[10월26일] 안중근 의사 기념관 101년만에 개관(2010년)

1979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1979년 10월26일 저녁 7시35분경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아 62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박정희 퇴진”을 직접 내건 ‘부마항쟁’ 대응 방식을 둘러싸고 이견이 팽팽했다.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이 강경진압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온건한 대응을 각각 주장했다. 박 대통령이 차지철의 입장을 수용, 강경진압 쪽으로 방향을 정하자 진퇴 위기에 몰린 김재규는 이날 만찬 도중 박 대통령과 차지철을 살해하기로 결심, 실행에 옮겼다. 동석했던 정인형 경호처장과 안재송 경호부처장 등 4명도 희생됐다.

박 대통령은 이날 충남 아산군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뒤 오후 2시30분경 상경, 오후 4시경 차지철 경호실장을 통해 김 중앙정보부장에게 만찬을 준비하도록 하고 오후 6시 15분경 궁정동 중앙정보부 식당에 도착했다. 만찬 도중 차 경호실장의 오만한 태도에 흥분한 김 정보부장은 3차례나 만찬장을 드나들면서 당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 대령과 중앙정보부장 비서 박흥주 대령에게 범행을 지시한 후 다시 제자리에 앉자마자 박 대통령과 차 경호실장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이로써 18년 5개월간의 절대권력, 유신체제는 막을 내리게 됐다.

정부는 이튿날인 27일 새벽 전국(제주도 제외)에 계엄을 선포했다.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됐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임명됐다. 박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11월3일 거행됐다. 1980년 5월20일 대법원은 시해사건 상고심 판결에서 김재규와 중앙정보부원 4명에게 각각 사형을 확정했다. 김재규,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등 5명은 5월24일 새벽 총살형으로 처형됐다.

김계원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김재규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받고 10월29일 구속됐고, 12월20일 계엄 보통 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죄명은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 중요임무 종사 미수죄’였다. 그러나 며칠 뒤 사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82년 5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2010년 안중근의사 기념관 준공?개관


2010년 10월26일 오전 11시 서울 남산의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새로 건립됐다.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1주년 기념일에 맞춰 준공 및 개관한 것이다.

준공 및 개관식은 김 양 당시 보훈처장, 안의사 유족, 독립운동관련 단체장, 광복회원, 시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응모 숭모회 이사장의 약전낭독, 박유철 기념관 건립위원장의 경과보고, 이명박 대통령의 축하메시지 대독, 김영일 광복회장의 축사, 동상제막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옛 기념관을 철거하고 작년 3월26일 안의사 순국 99주기 추념식에 기공식을 한 후 국고 146억원과 국민성금 33억원 등 모두 179억원의 예산으로 건립됐다.

부지면적 5772㎡(1750평), 연면적 3756㎡(1138평)에 지하 2층, 지상 2층 규모로 단지동맹에 참여한 12인을 상징한 12개의 기둥으로 건물을 형상화했다.

서울시는 개관에 맞춰 기존 안의사 동상을 철거하고 6억원의 예산으로 가로 4m, 세로 4m, 높이 7.2m의 청동 동상을 새로 건립했다.

기념관은 안의사의 출생에서부터 순국까지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전시관과 관람객의 추모, 명상, 교육을 위한 명상의 길, 추모홀, 도서휴게실, 수장고 등의 시설을 갖췄다.

안의사는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일제침략의 원흉인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권총으로 저격한 후 체포돼 뤼순 감옥으로 이송, 사형을 선고 받고 1910년 3월26일 순국했다.

2010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600여명 사망·실종

2010년 10월26일 저녁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부속섬인 믄타와이 군도 앞바다에서 거대한 지진해일(쓰나미)이 해안을 덮쳐 최소 113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실종됐다. 10시간 전 발생한 진도 7.5의 강력한 해저지진의 여파였다.

25일 밤 믄타와이 군도에서 서쪽으로 약 78㎞ 떨어진 바다 밑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곧바로 쓰나미 경보를 발령했지만 1시간 만에 해제했다. 쓰나미의 특성을 잘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믄타와이섬 한 해안 마을의 어업부 공무원은 “주민 200여명 중 160여명이 실종됐고 건물 80%가 무너졌다”며 “주민들은 파도에 휩쓸리는 아이들을 붙잡을 수조차 없었다”고 긴박한 상황을 전했다. 인도네시아 국립 재난관리국의 아골로 수파르토 대변인은 “10개 마을이 통째로 쓰나미에 휩쓸렸다”고 말했다.

믄타와이섬과 가까운 파가이섬의 서핑 리조트에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관광객도 페이스북에 “모든 건물들이 쓰나미에 휩쓸렸다”고 전했다. 믄타와이섬에서 활동중인 국제구호단체 서프에이드의 한 활동가는 자체 웹사이트에 “3m 높이의 파도가 리조트를 덮쳤으며, 정박중인 선박끼리 부딪치다가 폭발해 불길에 휩싸였다”고 썼다.

인도네시아는 2004년 12월에도 수마트라섬 앞바다에서 규모 9.2의 강진과 쓰나미가 발생해 최소 22만여명이 숨지는 참사를 빚은 바 있다.

2010년 ‘후세인의 입’ 아지즈 사형선고

2010년 10월26일 사담 후세인 정권의 입 노릇을 했던 타리크 아지즈 전 이라크 외무장관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뉴욕 타임스>는 이날 “안경을 쓰고 시가를 문 채로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 쿠웨이트 침공, 시아파와 쿠르드족 학살의 정당성 등을 강변했던 타리크 아지즈가 시아파 정당을 박해한 혐의로 이라크 최고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보도했다.

그가 20년 동안 박해한 것으로 지목된 시아파 다와당의 대표는 친미 성향의 현 이라크 총리 누리 알말리키다. 아지즈는 안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라크를 벗어나지 않았던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을 대신해 국제무대에서 이라크를 대변해 ‘미스터 이라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뉴욕 타임스>는 “사형의 집행 날짜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아지즈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직후 미군에 항복했으며, 올여름 미국이 이라크에 치안권을 넘기며 철군한 뒤 이라크 정부에 신병이 넘겨졌다. 그는 지난 8월 영국 <가디언>과의 옥중 인터뷰에서 “(미군이) 떠나면 안 된다. 이라크를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다”라며 미군의 철수 계획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아지즈의 변호인들은 “아지즈는 후세인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며 “이날 결정은 이라크 정부군이 수감자들을 고문했다는 위키리크스의 폭로로 곤경에 빠진 정부가 여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정치적 쇼”라고 주장했다. 영어 교사 출신인 아지즈는 1991년 걸프전 때 외무장관이 된 뒤 15년 넘게 후세인 정권을 대외적으로 대변해왔으며, 후세인 정권 각료들 중 하나뿐인 기독교도였다.

2011년 12월5일 사드 요시프 알부탈리비(Saad Yousif al-Muttalibi) 총리 자문역은 “아지즈의 사형집행은 미군의 이라크 철수 뒤 확실히 집행됐다”고 밝혔고, 이 장면이 CNN에 보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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