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4일]집시의 반란, 사르코지의 패배
2010년 유럽, 집시추방 반대 첫 대규모 시위
2010년 9월4일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과 유럽 각지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정부의 집시 추방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처음 열렸다.
이날 파리 도심에서는 정부의 집시촌 폐쇄 조치로 집을 잃은 집시 40명을 선두로 약 5만명(경찰 추산 1만2000명)의 시위참가자들이 집시 추방을 비롯한 정부의 새 치안 정책에 항의하며 행진을 벌였다. 남서부 보르도에서도 1000명이 넘는 시위자들이 정부의 ‘외국인 혐오증’ 정책 폐지를 요구하면서 2시간 동안 행진했고, 툴루즈에서도 ‘국가적 인종주의’를 규탄하는 비슷한 규모의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사르코지 대통령이 소수자들을 범죄자로 낙인찍고 치안정책을 이용해 정치적 지지기반을 다지고 있다면서 정치적 난민들을 적극 수용했던 프랑스의 전통 또한 깨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날 영국 런던과 벨기에 브뤼셀 주재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도 시위자들이 피켓 등을 들고 사르코지 정부를 비판했다.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도 프랑스 대사에게 전달할 항의서한 낭독식이 열렸다.
사회당 소속인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시장은 “인종차별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에 대한 투쟁의 날”이라고 선포했다. 세실 뒤플로 녹색당 대표는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는 본질, 즉 조롱받고 있는 프랑스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위대 자체 추산 10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인권운동가들과 인종차별 반대단체, 노동조합, 좌익정당들이 연대한 시위 조직위는 프랑스와 유럽 각지의 135개 도시와 마을에서 프랑스 정부의 집시 추방 정책을 비판하는 시위가 열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 내무부는 7만7000여 명으로 추산했다.
집권 대중운동연합(UMP)의 에릭 시오티 사무총장은 시위대를 범법자들과 공모한 집단이라고 몰아세웠다. 집권당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적어도 65% 이상의 국민이 찬성하고 있다”며 이 정책을 계속 추진할 입장을 거듭 밝혔다.
2012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사르코지는 패배했다. 그의 정책을 지지했던 65%는 다른 이유로 그에게 등을 돌린 것일까? 다음은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집시들의 반(反)사르코지 동영상.
2009년 나토군 “아프간 공습때 민간인 사망”
2009년 9월4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군이 감행한 아프가니스탄 공습에서 민간인이 다수 사망한 사실을 NATO측이 시인하면서 지구촌이 술렁였다. 이번 공습으로 민간인 사망자 수가 최고 100명으로 추산됐다.
NAtO군은 나흘 뒤인 같은 달 8일 성명을 발표했다. “처음에는 나토군이 공격한 연료탱크 주변에 탈레반만 있는 것으로 믿었지만, 조사 결과 민간인 사상자도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군은 앞서 “민간인 사망자는 없다”고 말해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같은 날 독일 의회 연설에서 “독일군의 요청으로 이뤄진 공습으로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데 유감을 표한다”면서 이번 사건을 철저히 조사할 것을 약속했다.
탈레반은 즉각 이를 심리전에 활용했다. 사고 사흘 뒤인 같은 달 7일 탈레반은 e메일 성명을 통해 NATO의 폭격에 따른 민간인 사망자 79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이어 “NATO군의 이번 공습은 민간인을 목표로 했으며, 이는 국제법에서 명백히 범죄로 규정한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지난달 대선에서 부정선거 의혹으로 미국의 비판을 받은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도 같은 날 “나토 공습은 중대한 실수”라고 비난했다. 그는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히고 “매크리스털 사령관이 전화를 걸어와 사과했다”고 전했다.
2000년 동아시아 여성포럼, 대만에서 개막
2000년 9월4일 대만 타이베이시에서 동아시아 8개국 비정부기구(NGO) 여성단체들이 ‘제4차 동아시아 여성포럼’을 열었다. 주제는 <새로운 세기-새로운 여성>이었다. 같은 달 7일까지 나흘간의 일정으로 열린 이 포럼은 주최국 대만을 비롯, 한국과 일본, 홍콩, 몽골, 러시아 등에서 300여명이 참석했다.
중국은 대만을 자국 영토로 표기하지 않는 데 항의해 불참했다. 4일 개막식에 이어 5일부터 1.여성과 개발 2.여성과 인권 3.여성의 정치참여 4.여성과 교육 5.여성과 건강 6.여성과 문화 7.여성과 환경 8.청년포럼 등 8개의 이슈를 다루는 워크숍이 열렸다. 특히 정보통신 시대를 맞는 여성들의 지위문제 등이 새롭게 부각됐다.
‘동아시아 여성포럼’은 동아시아 8개국 여성 NGO들이 2년마다 모여 여성지위 향상을 논의하는 대회로, 1993년 ‘북경 세계여성대회'(1995년 개최)’ 준비과정에서 만들어졌다.
한편 이날로부터 꼭 5년 전인 1995년 9월4일 북경 중심가 북쪽의 국제회의센터에서 제4차 북경 ‘세계여성회의’가 열렸다. 주제는 평등, 발전, 평화. 185개 가입국 가운데 소말리아, 유고슬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도미니카 등 7개국을 제외한 178개국 정부 대표들과 각종 UN산하기구 대표 1만여 명이 참석했다. 꼭 20년 전인 1975년 멕시코 시티에서 열렸던 1차 세계여성회의 GO 회의 때 2000여 명이 참가한 것에 견주면 5배가 넘는 참가자수를 기록했다.
북경 ‘세계여성회의’에서는 유엔의 ‘성(性) 주류화’ 전략이 화두였다. “여성은 더 이상 남성과 사회의 보호 대상이 아니며 남성과 더불어 동반자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경 행동강령은 12개 관심 분야별 361개 행동 지침으로 짜여져 있다.
‘여성들이 정치, 경제면에서 실제 권한을 가져야한다’는 개념이 새로 등장했다. 또 성(性)과 임신, 출산에 대한 여성들의 ‘건강 결정권’이 본격 논의됐다. 아울러 ‘여성이 자신의 성생활과 자녀수 결정에 권리를 가진다’는 개념도 제기돼 바티칸과 회교권 국가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채택됐다.
1965년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 사망
1965년 9월4일 의사이자 신학자, 철학자, 음악가였으며 지구촌의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원시림의 성자’로 불렸던 알베르트 슈바이처(Schweitzer Albert, 1875년 1월14일 출생) 박사가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Lambarene) 병원에서 90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슈바이처는 독일인으로 태어났으나, 고향 알자스 카이제르스부르크가 1차 대전 후 프랑스령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프랑스인이 됐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목사와 대학강사로 활동했다. 어려서부터 천부적 재질을 보인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로도 활약했다.
1913년 프랑스령 가봉으로 건너가 오고웨 강변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개설하고 흑인들을 치료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포로의 몸으로 본국으로 송환됐다가 대전이 끝난 뒤 다시 랑바레네로 돌아가 박애정신을 실천했다.
그는 1928년 괴테상을 수상하고 195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됐다. 1952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는데 상금을 모두 나환자촌을 세우는 데 썼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행한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제목은 <현대세계에 있어서의 평화의 문제>였다. 1957년 버트런드 러셀, 1962년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등에서는 핵실험 반대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지구촌은 박사가 아프리카 생활을 회상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1921)>가 출간하자 그제서야 그의 생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