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0일] 이란 대통령 폭사, 레닌 저격 당한 날

2010년 印尼 시나붕 화산 400년 만에 폭발

2010년 8월30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성층화산인 시나붕(Sinabung/Gunung Sinabung) 화산(해발 2451m)이 400년 만에 폭발했다. 이 화산은 지난 29일 첫 폭발을 일으켜 주민 2명이 숨진 데 이어 30일 2차 폭발을 했다.

화산 폭발로 주민 2만여 명이 긴급 대피했다. 화산재가 2000m 상공까지 치솟자, 항공당국은 인근 항로를 지나는 항공기들에게도 우회운항을 지시했다.


2010년 카다피 종횡 행보에 뒤집어진 이탈리아

2010년 8월30일 당시 양국 우호조약 2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하루 전인 29일 이탈리아를 찾은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만찬연설에서 “유럽이 불법 이주자들로 ‘검은 유럽’이 되지 않으려면 유럽연합이 리비아에 해마다 최소 50억 유로를 지불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내일의 유럽은 또 다른 아프리카가 될 것”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탈리아가 식민 지배 보상금으로 50억 달러를 지불하는 대신 리비아는 불법 이민자를 단속한다”는 내용을 뼈대로 2년 전인 2008년 8월 양국이 체결한 ‘이탈리아-리비아 우호 조약’을 거론하면서 이탈리아 정계와 외교가를 한껏 자극하고 나선 발언이었다. 그는 “이탈리아도 자신의 ‘불법이민 종식’ 계획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옆에 서있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침묵을 지켰다.

카다피는 또 이날 로마에 있는 리비아문화센터에서 현지 젊은 여성 200명을 모아놓고 한 강연에서 “서구보다 리비아에서 여성들이 더 존중받는다”며 “리비아 남편감 물색을 도와주겠다”고 제의했다. 이탈리아 남성들이 발끈한 것은 물론이다.

카다피는 하루 전에도 설화를 일으켰다. 리비아 대사관에서 70~80유로를 주고 동원한 500명의 젊은 여성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설교를 하고 코란을 나눠준 뒤 “이슬람이 모든 유럽인들의 종교가 돼야 한다”며 개종을 촉구했다. 참석 여성 3명이 즉석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로마 가톨릭의 본산인 이탈리아는 당연히 발칵 뒤집혔다.

리비아는 32년간 이탈리아의 식민지배(1911~1943년)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탈리아의 석유·천연가스 공급국이자 주요 투자국이 됐다. 이탈리아는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으로 리비아에 향후 20년간 50억 달러를 고속도로 건설 등 사회간접시설 투자로 지불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카다피 퇴진이 임박했던 지난해 2월27일 이탈리아는 리비아와 체결한 ‘불가침 조약’의 효력을 중지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 조약에는 “이탈리아는 리비아에 대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적대적인 군사행동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포함돼 있다. 이탈리아의 이 같은 움직임은 유사시 국제사회가 리비아에 군사개입을 할 수 있도록 사전 작업에 들어간 것이었다. 얼마 안 있어 이탈리아는 카다피에 선전포고를 했다.

1999년 동티모르 독립투표, 주민 78.5% 독립 지지

1999년 8월30일 실시한 동티모르 주민투표 결과 78.5%라는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지지했다. 50일 뒤인 같은 해 10월20일 인도네시아 최고 정책 결정기구인 국민협의회(MPR)는 동티모르의 독립을 승인했다. 동티모르가 마침내 독립국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동티모르는 16세기 이래 포르투갈의 식민통치를 받아오다가 지난 1976년 인도네시아에 강제 합병됐다. 전체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여만 명이 독립투쟁 과정에서 희생돼 국제적 인권 사각지대로 주목을 받아왔다.

1981년 이란 라자이 대통령, 수상과 함께 사망

1981년 8월30일 이란 수도 테헤란 소재 수상관저에서 강력한 폭발물이 터져 모하메드 자바드 바호날 수상과 라자이 대통령, 그리고 다른 관료 5명이 사망했다. 반군이 일으킨 폭발사고는 성직자들이 지배하는 혁명정부에 대한 저항을 의미했다.

같은 해 6월28일 강력한 당 지도자인 모하메드 베헤스티와 70명이 사망한 이슬람 공화당 집회에서의 돌발사고 이후 가강 강력한 것이었다.

라자이 대통령은 1974년 팔레비 정부에 의해 체포되지만 1978년 이란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석방, 새 정부의 교육장관이 됐다. 그 뒤 국무총리에 이어 1981년 3월11일 이란의 제2대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이날 이슬람 반군의 소행으로 알려진 폭탄테러로 최후를 맞게 됐다. 임기가 5개월 남짓 밖에 안 된다.

1918년 블라디미르 레닌 피격 사건

1918년 8월30일 한 해 전 러시아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블라디미르 레닌은 모스크바 소재 한 공장을 찾아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연설을 마치고 공장을 나서는 순간 한 여성의 총격을 받고 부상을 입었다.

공장 건물을 나서며 자신의 차에 오를 무렵, 한 젊은 여성 한 명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쳤고, 레닌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세 발의 총알 중 두 발의 총알이 각각 왼쪽 어깨와 턱에 명중했다.

범인 파니 카플란(1890~1918)은 현장에서 체포됐고, “레닌을 반역자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저격 이유를 밝혔다. 사건 발생 나흘 만에 카플란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총상을 입은 레닌은 병원 대신 크렘린궁으로 이송됐다. 추가 암살기도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암살 미수사건 6년 뒤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공식 사인은 발작증세였는데, 이 증세는 총상 후유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통설이다.

레닌을 저격해 6년 뒤 사망에 이르게 한 유태인 여성 파니 카플란.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One comment

  1. On Aug. 30, 1918 Fanny Kaplan – a Jewish Revolutionary Socialist, who was disillusioned with the development of the Russian Revolution – attempted to assassinate Bolshevik leader Vladimir Lenin…
    Lenin took three bullets from Kaplan, two of which wounded him seriously. Kaplan was arrested, interrogated, and shot when she refused to name any co-conspirators. In the aftermath the Bolsheviks initiated a so-called Red Terror campaign, arresting and executing hundreds of non-Bolshevik revolution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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