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0일] 오슬로 협정, 이란-이라크 종전

2000년 동티모르 독립운동지도자 구스마오 민족해방군 총사령관직 사임

2000년 8월20일 동티모르 초대 대통령이자 2012년 현재 4대 총리를 지내고 있는 독립영웅 샤나나 구스망(포르투갈어 Xanana Gusm?o)이 민간 지도자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동티모르 민족해방군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1992년 인도네시아 정부군에 체포돼 7년간 옥고를 치르고 난 이듬해 일이었다.

그 2년 뒤 그는 동티모르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돼 2002년 5월부터 2007년 5월까지 역임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같은 해 8월8일부터는 제 4대 총리로 취임해 현재까지 일하고 있다.

사나나 구스망은 1946년 6월20일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동티모르에서 태어나 신학교를 졸업한 뒤 시인과 교사를 지내다 1975년 인도네시아가 침략하자 무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93년 이-팔, 오슬로 협정 타결


1993년 8월20일 노르웨이 외무장관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대표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비밀리에 만나 팔레스타인 자치안에 합의했다. 며칠 뒤인 9월13일 워싱턴에서 이스라엘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이 합의안에 서명, 두 민족간 평화와 공존의 모험이 시작됐다. 아라파트 의장과 라빈 총리, 이스라엘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는 이 협정 체결로 19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오슬로 협정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갈등과 분쟁을 계속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분쟁을 종식키로 한 1993~1995년에 걸친 평화협정이다. 협정은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등 점령지를 반환해 팔레스타인 자치국가를 설립케 하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투쟁을 포기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땅과 평화의 교환’이 기본원칙으로,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합의보다는 향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단계별 협상과정 설정에 중점을 뒀다.

이에 따라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돼 1996년 1월 아라파트 PLO 의장이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됐다. 이 과정에서 서명 당사자인 이스라엘 라빈 총리가 1995년 이스라엘 극우파에 암살당하고 팔레스타인에서도 강경파에 의한 테러가 계속 되는 등 위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2000년 중반까지 서안의 40%, 가자지구의 65%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직접 또는 부분적 관할로 이양됐다.

다만 자치정부의 최종성격, 동예루살렘의 지위,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 이스라엘 군의 배치 등을 다루는 최종지위협상이 2000년 7월 결렬돼 같은 해 9월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민중항쟁)가 발생하면서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아라파트 대통령은 2004년 11월11일 프랑스 파리의 어느 병원에서 사망했으며 이집트 카이로에 안장됐다.

현재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가 팔레스타인 임시행정당국 PA로 이름을 바꿔 제한적인 자치를 하고 있을 뿐, 점령지로부터의 이스라엘군 철수, 점령지 반환, 자치권 확대 등 구체적인 이행은 아무런 진전이 없다.

1988년 이란-이라크 정전 발효

1988년 8월20일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결됐다. 1980년 9월22일 이라크 군대가 양국의 접경지대인 이란의 서부지역을 침공하면서 비롯된 전쟁이 8년 만에 끝나는 순간이었다. 한 해 앞선 1987년 7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이라크에 즉각적인 정전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양국도 유엔 안보리의 결의안에 따라 이라크는 1988년 7월18일에 이란은 8월 6일에 각각 정전안을 수락했다.

양국은 철병과 포로교환, 전쟁책임 등에 대한 조사는 정전 뒤에 본격 협의하기로 했다.

페르시아만의 패권확립을 노렸던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혁명 직후 이란의 불안정과 국제적 고립에 편승해 양국 국경을 흐르는 사트 알 아랍강의 영유권 분쟁을 구실로 1980년 9월 이란 공격에 나섰다.

전쟁결과 사망자가 이란 25만 명, 이라크 10만 명에 이르렀고 부상자도 각각 50만 명, 15만 명을 기록했다.

1977년 한국 최초 원자력 발전소 가동

1977년 8월20일 오전9시 한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시설용량 59만5000kw의 고리원자력 발전1호기가 송전을 시작했다. 이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최초 이날 울산 변전소를 거쳐 부산 지방에 송전됐다. 착공 7년 만에 완공된 고리원자력 1호기는 3개월간의 시험 발전 끝에 성공했다. 한국은 동양에서 일본과 인도에 이어 3번째, 세계 20번째 핵 발전 국가가 됐다.

1940년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 피살

1940년 8월20일 볼셰비키 혁명가이며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본명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이 멕시코 시티 외곽의 거주지에서 암살됐다.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스페인의 공산주의자 라몬 메르카데르가 휘두른 얼음 깨는 도끼가 그의 머리를 강타했던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튿날 병원에서 “It’s the end. this time, they’ve succeeded(이제 끝이로군… 이번엔… 그자들이 성공했어)”라는 영어로 마지막 말을 뱉고 숨졌다.

우크라이나의 부유한 농가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난 트로츠키는 런던에서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과 처음 만났다. 1902년 런던으로 망명할 당시 위조 여권에 쓴 이름이 레온 트로츠키였다.

초기에는 레닌의 든든한 원군으로 활동하다 점차 레닌의 급진노선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관계가 멀어졌다. 이후 온건파인 멘셰비키에 가담하면서 당시 혁명파인 볼셰비키당을 이끌던 레닌과의 관계가 더욱 냉각됐지만 1917년 러시아 민중혁명인 2월 혁명을 계기로 레닌과 다시 손을 잡았다.

볼셰비키당에 정식으로 입당한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10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소비에트 연방을 건설하고 초대 외무부 장관을 맡았다. 1918년 붉은 군대를 창건해 황제파인 백군과의 내전에서 승리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트로츠키는 레닌으로부터 2인자 자리까지 제안 받지만 러시아의 뿌리 깊은 반 유대계 정서를 의식해 번번이 고사했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레닌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과 당의 노선을 놓고 본격적인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생전의 레닌보다 더 급진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소비에트 연방을 튼튼한 공산주의 국가로 만든 다음 공산혁명을 확산시켜야 한다는 스탈린에게 맞서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으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계속 진전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의 세계혁명 이론은 당시 서유럽의 공산주의 지식인과 혁명가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인민의 적’으로 몰리면서 그의 사상(트로츠키주의)도 힘을 잃어갔다. 스탈린은 10월 혁명 당시 트로츠키의 역할을 축소 왜곡하고, 트로츠키주의를 레닌주의에 적대적인 사상이라고 비판하는 등 중상을 일삼았다.

결국 1927년 트로츠키는 당에서 제명당하고 소비에트 연방에서 쫓겨났다. 1936년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대대적 숙청으로 가족과 측근 대부분도 잃었다. 트로츠키는 이후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 등지를 떠돌면서도 끝까지 스탈린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반 스탈린주의 투쟁을 벌였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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