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9일]싱가포르 독립기념일
2008년 팔레스타인 시인 마무드 다르위시 사망
2008년 8월9일 팔레스타인 저항 시인 마무드 다르위시(Darwish, Mahmoud)가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6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오랫동안 심장질환을 앓아온 다르위시는 이날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한 병원에서 수술받던 중 병세가 악화돼 숨졌다.
팔레스타인 최고의 시인으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에 대한 비판에 앞장서온 다르위시는 21권의 시 전집을 출간했으며, 그의 시는 20여개의 언어로 번역됐다. 또 레닌 평화상(1983) 등 많은 문학상을 수상했다.
1941년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호수 근처 마을 알 비르와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 이스라엘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시를 짓고 좌파신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1988년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의 팔레스타인 독립 선언문을 기초했으나 1993년 아라파트 의장이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에 합의하자 PLO를 탈퇴했다.
1999년 일본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 가결
1999년 8월9일 일본은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각각 일본의 국기, 국가로 법적 지위를 얻었다. 이날 일본 참의원이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을 가결, 국기와 국가로 규정하기 전까지는 일본인에게 심리적 차원에서만 국기·국가였을 뿐이다.
일본의 국기·국가법 입법 추진은 1999년 초 히로시마의 한 고교 교장 자살사건으로 촉발됐다. 이 교장은 졸업식에서 히노마루의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지시했지만 교사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민당을 비롯한 우익세력은 기다렸다는 듯 국기·국가법 제정을 공론화했다. 그동안 물밑에서 추진돼오던 우익의 ‘숙원 사업’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는 당시 일본 사회의 우경화 흐름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다.
법안 상정은 집권 자민당이 주도했다. 사회당과 공산당은 법안에 반기를 들었다. 군국주의 시대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반대 이유였다. 기미가요의 ‘기미(君)’가 누구를 지칭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일었을 때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일왕’을 가리킨다고 일갈했다. 입법 과정 내내 군국주의 회귀 논란에 휩싸였다.
제1야당 민주당은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당 내부에서 찬반이 엇갈린 것이다. 간 나오토 대표는 찬성한 반면 하토야마 유키오 간사장은 사회분열을 조장한다며 부정적 태도를 견지했다. 민주당은 결국 기미가요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히노마루는 국기로 인정하는 수정안을 냈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법안은 속전속결로 처리됐다. 오부치 총리의 법제화 지시 이후 참의원 통과까지 5개월가량 걸렸을 뿐이다. 일본 교원노조와 한국 등 주변국들의 반대 목소리는 거의 무시됐다.
일본 패전 후 잠깐 금지된 몇 년을 빼곤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은 ‘권장사항’이었다. 개인 양심에 맡긴 것이다. 하지만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일 정부는 이를 ‘강제’할 근거를 얻게 됐다. 하지만 법 제정 이후로도 국기·국가의례를 거부해 갈등을 빚는 경우가 끊이지 않았다. 종교적 신념 외에 군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의례 거부의 핵심적 이유였다.
10·26사태 잉태한 YH여공 농성
1979년 8월9일 YH무역 여공 170여 명이 서울 마포의 신민당사 4층 강당을 점거하고 노사분규 문제로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은 해산 종용에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자 이틀 뒤인 8월11일 심야에 기습 연행작전을 감행했다. 이 와중에 여공 1명이 투신자살하고 신민당 의원들과 취재기자들이 부상 또는 연행당했다.
같은 해 5월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선명 야당’을 내세운 김영삼 씨가 새 총재로 선출되면서 유신 정국은 암운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날 YH노조의 점거를 강제해산한 경찰의 폭력적 해산 작전이 보도되자 박정희 정권은 신민당 내부와 법원, 국회를 조종해 8월11일 김영삼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10월4일 의원직 제명을 강행했다. 이는 10월22일 부산 마산 일원에서 폭발한 부마(釜馬)항쟁으로 이어졌고, 폭압적 강경일변도 통치는 집권세력 내의 분열을 가져와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한 10·26사태로 귀결됐다.
1965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
1965년 8월9일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했다.
싱가포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3세기 중국의 문헌에 나온다. 14세기경에는 7세기 이후 스리비자야 왕국에 속하며 자바어로 ‘바다 마을’이라는 뜻의 어촌 ‘테마섹”(Temasek, Tumasek)’이라 불리었다. 복수의 항로가 합류하는 말레이반도의 끝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이 더해져 다양한 나라의 선박이 기항하는 등, 테마섹은 중요한 무역도시로 떠올랐다.
16세기와 19세기 사이에 싱가포르는 조호르 술탄국의 일부였다. 포르투갈 군대는 1617년 말레이시아-포르투갈 전쟁 중에 싱가포르를 불태웠다. 이후 16세기 동안에는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으며 17세기에는 네덜란드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1819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경이 이 지역에 상륙, 조호르의 술탄과 계약을 맺고, 싱가포르를 국제무역항으로 개발했다. 이때부터 성장가도를 달린다. 영국의 인도 정부가 1858년부터 이 지역을 관할했으며, 1867년부터 정식으로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됐다. 1869년까지 싱가포르의 인구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제국 군대가 말레이시아를 침공,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6일간 영국군은 치열한 방어를 했지만, 1942년 2월15일 일본에 항복한다. 일본은 싱가포르를 쇼난(昭南)으로 개명, 1945년 9월12일 일본이 항복한 후 영국군이 탈환할 때까지 지배했다.
1959년에 리콴유(Lee Kuan Yew) 수상과 유소프 빈 이샥(Yusof bin Ishak)에 의해 자치주가 됐으며, 1962년에는 말레이시아에 합병됐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와의 이념적인 차이로 1965년 8월9일 독립국가로 새출발한다. 유소프 빈 이샥이 초대 대통령으로 리콴유가 초대 수상으로 계속 집권했다.
새로운 국가로서 싱가포르는 당면한 실업과 자급자족의 문제가 심각했다. 그러나 1959년부터 1990년까지 이콴유 수상의 장기 집권 기간 동안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어 홍콩에 버금가는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관 주도의 경제 사회정책의 집행은 공산주의보다 더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에 고촉통(Goh Chok Tong)이 총리직을 승계했고, 2004년에는 리콴유 전 총리(현재 국가자문)의 큰아들인 리셴룽(Lee Hsien Loong)이 3대 총리로 집권하고 있다. 레센룽 총리는 현재 세계에서 봉급을 가장 많이 받는 정부수반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 라오스 군부 쿠데타
1960년 8월9일 밤 ‘노사반’이 실권을 쥐고 있는 ‘솜사니트내각은 ‘콩 레’ 대위가 지휘한 쿠데타로 어처구니없이 무너졌다. 콩 레는 ‘푸마’전하를 수상에 앉혔다.
남부의 사바나켓트로 달아난 ‘노사반’은 미국의 원조로 군대를 조직하고 북상, 수도 비엔티안을 공략했다. ‘푸마’수상은 캄보디아로 망명하고 ‘콩 레’대위는 시외로 달아났다. 그리고 1960년 12월 ‘분움’이 수상으로 선출됐다.
‘분움’은 낙천적이며 정치항 의사도, 능력도 없는 인물. ‘노사반’에겐 그 점이 더욱 좋았다. 노사반의 가족과 친척들은 모두 이권이 있는 정부의 요직을 차지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