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6일]이집트 수에즈운하 국유화 선언, 전쟁!

2010년 ‘킬링필드’ 전범 첫 단죄

2010년 7월26일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 당시 ‘킬링 필드’ 학살 주도자에게 징역 30년이 선고됐다. 크메르 루주 학살 책임자에 대한 30여 년만의 첫 단죄로, 이를 계기로 다른 주요 인사들에 대한 판결도 이어졌다.

UN이 후원하는 캄보디아 특별법정은 이날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된 전 뚜얼슬랭 수용소(일명 S-21) 소장 카잉 켁 에아브(당시 68세)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캄보디아인들에게 ‘도이크’로 불리는 그는 11년간 구금돼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19년을 더 복역해야 한다.

재판부는 “모든 S-21 수용자들은 적을 모조리 분쇄하겠다는 캄푸치아공산당(크메르 루주)의 정책에 따라 처형됐다”며 “피고인의 범죄는 자백과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입증됐다”고 밝혔다.

도이크는 크메르 루주가 1975년 정권을 잡은 뒤 프놈펜의 한 고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수용소에서 1만5000여명에 대한 고문과 처형을 지휘한 혐의로 기소됐다. 희생자들은 ‘혁명의 적’임을 자백할 때까지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고, ‘킬링필드’ 중 한 곳인 근처 과수원에서 처형당했다. 이날 재판에서 도이크는 방탄유리가 설치된 피고인석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선고 내용을 들었다.

도이크는 교편을 잡던 1967년 크메르 루주 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타이와의 국경지대 밀림에서 크메르 루주 게릴라 수용소장을 맡으면서부터 악명 높은 수용소장 역할을 예고했다. 크메르 루주 정권이 1979년 붕괴한 뒤 이름을 바꾸고 월드비전 활동가들을 돕는 등 ‘신분 세탁’을 하고 지내다 1999년 당국에 자수했다. 그는 예심절차 중 학살 현장에서 “날 용서해달라”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170만 명이 학살되거나 굶어죽은 책임을 묻기 위해 2006년 시작된 특별재판에는 크메르 루주 지도자 폴 포트(1928~1998)의 측근인 키우 삼판(81세) 전 국가 주석과 누온 체아(85세) 전 크메르 루주 최고 이론가 등이 회부돼 있다. 아엥 사리(86) 전 외교부 장관과 그의 아내 아엥 타리트(80) 전 사회부 장관도 피고로 법정에 섰다.

전범재판소는 지난 2011년 11월21일 이들 4명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4인방 중 키우 삼판만이 같은 해 6월 열린 첫 공판에서 “진실을 밝히는 데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누온 체아는 당시 “이 재판이 불쾌하다”면서 퇴장했고 아엥 사리는 진술 의사가 없다는 뜻을 같은 해 10월 재판소측에 전달했다.

UN이 주도하는 재판에 대해 캄보디아 정부는 공공연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는 크메르루주 전범 추가 기소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2011년 전범재판소의 지크프리트 블룽크 판사는 “새로운 범죄 사실 수사에 대한 캄보디아 정부의 간섭이 도를 넘어섰다”면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2000년 수하르토 국가재산 착복 혐의 기소

2000년 7월26일 인도네시아 검찰은 철권 통치자로 1998년 사퇴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1억5500만 달러의 국가재산을 착복한 혐의로 기소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일주일 뒤인 8월3일 인도네시아 검찰은 수하르토를 부패혐의로 공식 기소했다.

마르주키 다루스만 인도네시아 검찰총장은 “수하르토가 관리해오던 7개 자선재단에 의해 국가재산 1조4000억루피아(1억55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어 수하르토에 대한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장학재단을 설립해 국영은행 이익금의 일부를 장학기금으로 받은 뒤 이를 자신의 아들이 소유한 항공사에 지원하는 등 일가가 얽힌 구조적 부패상이 드러났다.

수하르토 사건을 지휘해온 안타사리 아자르 검사는 이날 수사진이 수하르토의 부패혐의에 대한 최종 조사결과를 법무장관에게 보고한 뒤“수하르토는 이 재단들의 기금을 기업들에게 빌려주는 부패행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고 밝히고 검찰측은 76명의 증인을 법정에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수하르토는 1966년부터 98년까지 32년 동안 장기집권하면서 철권통치를 펼쳤다. 대통령이라는 형식은 취했지만 사실상 왕에 가까웠다. 야당과 재야세력은 철저히 통제당했고, 군대는 그에게 충성했다. 절대적 권력을 업고 그의 여섯 자녀와 친척은 막강한 부를 축적했다.

지난 2004년 수하르토를 ‘20세기 가장 부패한 지도자’로 선정한 국제투명성기구(TI)는 그가 빼돌린 돈이 150억~35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검찰은 이를 다 밝히지 못한 채 수하르토의 병세 악화를 이유로 2006년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검찰이 제기한 15억4000만달러 청구 민사소송도 수하르토의 사망이 임박하면서 가족과 검찰의 ‘법정 밖 화해’로 매듭지어졌다.

수하르토가 2008년 1월 지병으로 86세의 일기로 자택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사법적 단죄는 이뤄지지 못했다. 수하르토 실각과 함께 부정하게 축재한 방송국과 도로, 선박회사 등을 은밀히 팔아치운 수하르토 일가의 재산은 여전히 국가에 한푼도 귀속되지 않고 있다. 집권 기간에 200만명을 투옥하고 100만명의 사망자를 낳은 ‘대량학살자’였지만 이에 대한 진상규명 역시 미비한 상황이다. 그의 사망 직후 인도네시아는 ‘개발의 아버지’로서 수하르토에게 ‘국가 영웅’의 칭호를 부여하자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1998년 캄보디아 첫 다당제 총선

1998년 7월 26일 캄보디아의 첫 자체 총선이 전국 1만1000여개 투표소에서 실시됐다. UN 감독하의 1993년 총선 이후 처음 갖는 자체선거다. 유권자 540만 명이 의회 의원 122명을 선출한 총선에는 집권 캄보디아인민당(CPP)과 야당인 푼신펙당을 비롯, 39개 정당이 후보를 냈다.

총선은 실력자 훈 센 제2총리가 이끄는 CPP와 노로돔 라나리드 전 제1총리가 이끄는 야당인 푼신펙당, 삼랭시 전 재정장관이 주도하는 삼랭시당 간의 3파전 양상을 보였다. 개표는 7월27일부터 시작됐고 투표결과는 8월5일 발표됐다.

개표 결과, 훈센 총리가 이끄는 CPP가 승리했다. 선관위가 예정보다 나흘이나 늦은 8월5일 국영TV를 통해 발표한 개표결과에 따르면 CPP는 203만표(41.4%)를 얻어 제1당이 됐다. 축출된 노로돔 라나리드 전 총리가 이끄는 푼신펙당은 155만여 표로 31.7%의 지지율을 확보하며 제2당이 됐다. 삼 랭시당은 69만9천여표를 얻어 14%의 지지율을 얻는 데 그쳤다.

1956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

1956년 7월26일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된 혁명 4주년 기념연설에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소련과 친선 관계를 유지했던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의 희생하에 구축된 것인데 외국의 부당한 지배하에 있어 이제까지 착취를 받아왔다”면서 “운하를 국유화하면 이집트가 얻을 수익은 연간 1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밝혔다.

나세르 대통령은 이어 “외국에 원조를 얻지 않고도 애스원댐을 건설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집트 국민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구미 각국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특히 수에즈 운하 회사의 소유권을 쥐고 있는 프랑스는 아연실색 했다. 조차권도 12년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세르는 미국과 영국이 신애스원댐 원조를 취소한 보복으로 국유화를 선언한 것으로 풀이됐다.

이집트는 이와 함께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의 통행을 막고 티란 해협을 봉쇄했다. 큰 타격을 입게 된 영국과 프랑스는 같은 해 10월29일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침공한 이스라엘과도 동맹을 맺고 이틀 뒤 수에즈운하를 폭격한다. 수에즈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이른바 제2차 중동전쟁이다.

그러나 이 전쟁이 자칫 세계 대전으로 번질 위험이 있어서 미국과 소련이 압력을 가했고 UN총회가 나서 3국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끝이 났다.

1955년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파키스탄 대통령 출생

1955년 7월26일 파키스탄 총리를 지낸 베나지르 부토의 남편으로 파키스탄의 유명한 정치인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우르두어:??? ??? ??????Asif Ali Zardari)가 태어났다.

그는 부인 부토가 2007년 폭탄 테러로 사망한 이후 유력한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사임한 후, 2008년 9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다. 9월9일 곧바로 취임식을 갖고 5년 임기의 대통령직 업무를 시작했다. 현재 집권 파키스탄인민당(Pakistan Peoples Party, PPP) 공동의장직도 겸하고 있다.

1950년 한국,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1950년 7월26일 한국전쟁 중이던 당시 북한군에 맞선 미국 1기병사단 7기병연대 예하 부대가 같은 달 29일까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난사로 노근리 주민 대부분을 학살했다.

노근리양민학살사건(老斤里良民虐殺事件)로 기록된 전쟁범죄로, 피해자 유족들로 구성된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는 사망자 135명, 부상자 47명 모두 182명의 희생자를 확인했다. 대책위 관계자는 “400여명의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살아 남은 사람은 겨우 10여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