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5일] 중국 탄천 2호 발사 성공(2004년)
2009년 중국 하얼빈에 정율성 사적전시관 개관
2009년 7월25일 한국출신 중국 혁명음악가 정율성의 사적 전시관이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浜)에 건립돼 26일 제막식을 갖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제막식에서는 정율성이 창작한 <연안송>을 딸 소제씨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군인 이대충이 불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전시관에는 정율성의 생전 사진과 소장품들이 전시돼 있어 그의 평범하지 않았던 일생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전남 광주 출신인 정율성은 난징과 상하이 일대에서 항일운동을 벌이다 1938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여…”라는 노랫말의 <팔로군 행진곡>을 지어 중국 인민군에 보급했으며 이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불리다 1988년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로 확정됐다.
팔로군행진곡은 1939년 말에 창작한 대형작품 <팔로군대합창>중의 한 가곡이다. 이 대합창은 1941년 ‘5ㆍ4청년절’ 음악공모전에서 1등상을 수상한 바 있다.
<팔로군행진곡>은 창작 직후 <팔로군 잡지>에 게재돼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의 인정을 받았고, 중ㆍ일 전쟁이 끝나고 국민당과 공산당간 내전이 시작되자 <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곡명이 바뀌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1951년 중화인민공화국 인민혁명 군사위원회 총참모부는 이 노래를 <인민해방군 군가>로 채택했다. 이어 1988년 7월25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소평이 서명함으로써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로 정식 확정됐다. 인민해방군 군가로 채택되면 인민해방군의 모든 의전행사시 반드시 연주해야 한다. 군대의 하나 뿐인 대표 군가인 셈이다.
이 노래의 특징은 첫 두 소절은 서곡 형식의 독립적인 악구로 언어의 리듬을 음악화한 것이다. 박진감 있는 당김음(切分音節奏)에 으뜸화음(主三和音)의 음들을 분해해 사용했으며, 동음반복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용감하고 기백 있는 군인들의 형상을 재치 있게 잘 부각시켰다. 창작 기법 상 서양 작곡 기법을 도입했지만, 중국 전통음악의 5성 음계로 만들어졌기에 이색적이면서도 전혀 낯설지 않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중국의 대표적 혁명음악가로 꼽히는 그의 생애는 조선족 영화감독 박준희에 의해 영화 <정율성>으로 제작됐으며 최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중국 공산당이 선정 작업에 나선 ‘신중국 창건 영웅 100명’의 후보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올랐다.
2007년 탈레반, 납치한 샘물교회 배형규 목사 살해
2007년 7월25일 아프가니스탄 경찰은 “가즈니주 카라바그의 무샤키 지역에서 머리·가슴·배에 총탄 10발을 맞은 한국인 남자 시신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청년신도 등 20명을 이끌고 아프간으로 선교활동을 떠난 분당 샘물교회 배형규 목사의 시신이었다.
같은 해 7월14일, 경기 성남시 분당 샘물교회 배형규 목사와 샘물교회 청년회 신도 등 20명은 단기선교와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아프간에 입국했다.
한국에서 출발한 20명과 아프간 현지에서 합류한 안내인 3명은 7월19일 버스를 타고 남부 칸다하르에 있는 힐라 병원과 은혜샘 유치원으로 향했다. 수도 카불에서 170㎞ 거리의 가즈니 주 카라바그 지역을 통과하다 탈레반 무장 세력에 납치됐다.
탈레반은 7월20일 아프간 주둔 한국군 철수를 요구하며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와 협상했지만 실패하자 한국정부와 직접 대화를 요구하였고, 7월24일에는 탈레반 포로 8명과 한국인 인질 8명을 맞교환하자고 요구했다.
탈레반은 그러나 이튿날인 7월25일 “인질 석방 협상이 결렬됐으므로 배 목사를 살해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탈레반은 수차례 협상 마감시한을 연장하다가 7월30일 심성민씨를 또다시 살해했다.
하지만 미국과 아프간 정부는 테러세력에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8월10일 한국이 가즈니에서 탈레반 대표와 처음 대면 협상을 시작하면서 인질 석방과 사태 해결의 물꼬가 트였다. 8월12일 아픈 여성 인질 2명이 석방됐다. 한국은 아프간 파병 다산부대를 연내 철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8월22일 한국과 탈레반이 남은 인질 19명을 전원 석방키로 합의한 후 같은 달 29~30일 인질 전원이 석방됐다.
배목사 일행은 당초 7월23일까지 아프간에 체류한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9월2일에야, 게다가 2명은 싸늘하게 식은 시신으로 고국 땅을 밟았다.
2010년 7월 희생자 유족이 “정부가 재외국민 보호의무를 위반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3억5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2011년 4월 “국가가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2006년 세계태권도연맹, 9월4일 ‘태권도의 날’ 지정
2006년 7월25일 세계태권도연맹(WTF·총재 조정원)은 베트남 호찌민시 에콰토리얼 호텔에서 총회를 열고 매년 9월4일을 ‘태권도의 날’로 지정했다. 9월4일은 1994년 파리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날이다.
2004년 지구탐사위성 ‘탄처(探測)2호’ 발사 성공
2004년 7월25일 중국은 산시(山西)성 타이위안(太原) 발사기지에서 지구 탐사위성 ‘탄천(探測) 2호’ 발사에 성공했다. 중국이 유럽우주국(ESA)과 공동으로 추진해온 ‘2개의 별 프로젝트(雙星計劃)’ 중 2번째 위성인 탄처 2호는 이날 창정(長征) 2C/SM 로켓에 실려 발사돼 궤도에 진입, 고도 681㎞에서 3만8278㎞의 궤도를 돌았다.
중국은 2003년 12월 탄천 1호 발사 성공에 이어 탄천 2호를 궤도에 올려 각각 적도와 극지방에서 ▲지구의 자장과 대기와 공간환경에 대해 연구하고 ▲우주 폭풍의 발생과 발달을 연구하는 등 3차원적 탐사체제를 구축했다.
ESA는 2001년 7월 중국과 합의아래 쌍성계획에 950만 달러를 제공했다. 탄천 1~2호에는 중국 과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중국과학원’과 ESA가 제공한, 탐사를 위한 각종 과학 장비들이 적재됐다.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적대관계 청산 공동선언
1994년 7월 25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후세인 요르단 국왕이 미국 워싱턴에서 양국 정상간 사상 첫 공식회담을 갖고 46년 지속된 해묵은 적대관계의 청산을 공동선언했다. 빌 클린턴 당시 미국대통령이 함께 서명한 이 공동선언에서 후세인 국왕과 라빈 총리는 “두 국가 사이의 전투상태를 끝낼 것을 전 세계에 엄숙히 선언한다”면서 “양국간은 물론 역내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천명했다.
양국 정상은 선언문에서 이 문서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안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거나 평화협상을 위한 결의에서 벗어난 여하한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과 아랍국가 및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간의 공정하고 지속적이며 폭넓은 평화를 위해 매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요르단은 1952년 국왕 후세인이 입헌군주제를 선포하고 친서방적인 외교노선을 폈다. 아랍제국 중 가장 친서방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걸프전 당시 이라크에 지지를 표명한 탓에 미국 등 서방측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1999년 2월 후세인 국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현재 요르단은 중동에서는 유일하게 입헌 군주제를 채택한 나라다.
1969년 ‘닉슨독트린’ 발표
1969년 7월25일 닉슨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유럽 7개국 순방을 위해 괌에 도착한 뒤 ‘베트남전 이후의 아시아와 미국의 역할’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발표했다. “자국의 방위는 자국이 맡아야 한다”는 이른바 ‘닉슨독트린’이었다.
닉슨이 이날 발표한 ‘아시아 외교 기본전략’의 주요 뼈대는 ▲조약상의 책무을 지키고 ▲동맹국의 자유 또는 미국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면 핵우산을 제공하며 ▲기타의 침략에는 각국의 자유노력에 의거한다는 내용이었다.
닉슨의 이날 발표는 베트남전에서 입은 심각한 피해를 반영한 것으로, 아시아에 대한 군사개입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닉슨은 이듬해인 1970년 2월18일 ‘1970년대 미국의 외교정책’을 나타내는 외교특별교서를 발표, ‘닉슨독트린’을 확정했다.
1917년 ?마타 하리, 사형 선고
1917년 7월25일 매혹적인 여성 스파이로 유명한 마타 하리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네덜란드 레우바르덴(Leeuwarden)에서 부유한 상인의 딸로 태어나 자바계 혼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도네시아에서 복무한 캠벨 매클라우드 대위와 결혼했지만 곧 이혼했다.
1905년 파리에서 ‘레이디 매클라우드’란 이름으로 직업 무희 활동을 시작했다. 자바 섬에서 온 공주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며 동양식 춤을 선보였으며, 이 우렵 ‘마타 하리’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마타 하리’는 말레이어로 ‘새벽의 눈’, 곧 태양을 뜻한다.
파리 등 대도시에서 명성을 날렸다. 마타 하리는 고급 창녀인 코르티잔(courtesan)으로 일하며 많은 장교들, 정치인들과의 스캔들을 남겼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 각국 고위급 인사들과 교류하다가 헤이그에서 독일 장교와 접촉한 사실이 알려져 이중첩자 의혹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베를린에 있던 마타 하리가 독일 정보기관으로부터 2만 마르크를 받는 조건으로 포섭돼 암호명 ‘H21호’로 연합군 고위 장교들을 유혹, 군사기밀을 정탐해 독일군에 제공해 왔음이 영국 정보기관에 의해 발각된다. 그녀가 수집한 정보는 연합군 5만 명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고급정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간첩활동 혐의로 파리에서 체포돼 군사재판을 받고 1917년 10월 파리 근처 뱅센에서 총살당했다.
그러나 마타 하리가 실제로 첩자였는지는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다. 1999년 영국 정보부 MI5가 “마타 하리가 ‘H21호’이라는 암호명으로 독일군에 주요 군사정보를 빼돌렸다고 자백했다는 프랑스측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내용의 한 정보보고서를 공개하면서 처형에 의문이 제기됐다. 고급 창녀 노릇을 했다는 점이 진실이라면, 그녀가 반드시 죽어줘야 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법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
1894년 7월25일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1890년대 일본은 경제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해외시장 침략을 꾀했다.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동맹세력으로 받아들여, 청일전쟁 2주 전 일본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에 동의, 침략전쟁을 승인했다.
당시 조선 말기의 무능한 왕조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차병(借兵)을 요청했다. 조선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톈진 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청군의 조선출동 통고를 받자마자 곧바로 조선에 침입했다.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해 친일 정권을 내세운 일본은 7월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평양전투에서 청군에 승리한 일본군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로 진격하고 진저우 성(錦州城)과 뤼순(旅順)을 점령했다. 전쟁에 참패한 청나라는 불평등 강화초안을 받아들여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을 맺었다.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로 일본자본주의는 급속히 발전했고,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