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0일] 아시안 액션스타 부르스 리 사망
2002년 남북 직항로 첫 시험비행
2002년 7월20일 대북 경수로 인력수송을 위한 양양국제공항과 북한 선덕공항 간의 남북직항공로 첫 시험비행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북한 고려항공 소속 70인승 TU-134 항공기가 승무원 14명을 태우고 이날 평양 순안공항을 출발해 예정보다 8분 늦은 오후 1시 8분에 전조등을 켠 채 양양 국제공항 활주로에 안착했다.
1시간 정도 양양공항에 머문 북한 항공기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KEDO의 현장 근무자 등 8명을 태우고 오후 2시 1분 북한 선덕공항으로 돌아갔다.
2002년 수단 정부-반군 국가 분리 합의
2002년 7월20일 아프리카 수단의 내전 당사자들이 내전 종식 방안에 합의했다. 이달 18일부터 케냐의 마차코스에서 비공개 협상을 벌여온 수단 정부와 수단인민해방군(SPLA) 양측은 이날 “수단 남부 지역에 대해 향후 6년간 자치를 실시한 뒤, 국제감시하에 분리독립에 관한 주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고 공동 발표했다. 19년간 2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수단 내전이 종결되는 순간으로 보였다.
SPLA의 샘손 크와제(Kwaje) 대변인은 “6년간의 과도기간에 SPLA는 자치를 실현할 것이며, 8월 중에 케냐에서 세부사항들을 협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8월 협상에서 권력과 부의 분배, 과도기간 국가통치를 위한 제도구축, 치안문제 등을 협의할 것이며 정전협정에도 서명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단은 1956년 영국과 이집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했으나, 인구의 75%를 차지하는 이슬람계 정권이 남부지역 비(非)이슬람계 주민들을 차별·탄압하면서 분쟁이 격화, 1983년 SPLA가 결성된 뒤 19년간 내전으로 200만명이 숨지고 400만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공식적으로 분쟁은 2005년 1월에 평화 협정에 체결되면서 끝났지만,?2011년 7월 남수잔이 독립하면서 여전히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1973년 부르스 리(이소룡) 사망
1973년 7월20일 전설적인 중국계 미국 액션영화배우 브루스 리(이소룡)가 사망했다. 그의 애인인 여배우 베티 팅 베이의 맨션에서 잠을 자다가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33세의 젊은 나이에 숨졌다. 사망원인은 영화계 흑막에 의한 암살, 뇌수종·가슴통증 때문에 마셨던 진통제에 의한 거부반응, 돌연사 등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10만건 이상의 부검의 경력을 가진 부검의사 R. D. Teare 교수는 사체에서 검출된 대마 성분 때문에 이소룡의 죽임이 대마초 흡연과 관련된 있다는 전문의 소견들에 대해 “무책임하고 비이성적”이라고 공식 부인했다. 결론적으로 이소룡의 사인은 아직도 논란 중이다.
브루스 리는 194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미국 텔레비전의 단역 배우로 일하다가 1971년 ‘당산대형’에 출연하면서 일약 액션영화의 스타가 됐다. 이 영화는 한 얼음 공장 노동자가 홀로 마약 조직에 맞서 싸운다는 진부한 스토리였지만 무술로 단련된 브루스 리의 근육질과 몸놀림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쌍절곤이라는 무기가 처음으로 등장한 ‘정무문’은 그의 최고 히트작이었다. 이후 ‘맹룡과강’ ‘용쟁호투’ 등을 통해 중국인의 강한 이미지를 보여주었고 ‘사망유희’ 촬영 도중 급사하였다.
브루스 리는 춤을 추듯 난비하는 쌍절곤, 괴성을 지르며 상대의 급소를 공격하는 동물적 민첩성, 결정타를 날린 뒤 보여주는 분노와 슬픔이 교차된 묘한 표정 등으로 전설적 인물이 되었다. 한편 1993년에는 그의 아들 브랜던 리도 영화촬영 도중 총기사고로 사망했다.
1969년 아폴로 11호 달 착륙
1969년 7월20일 인간이 처음으로 달 표면에 발을 디뎠다고 지구촌에 알려졌다. 미 항공우주국(NASA)는 미국의 유인우주선 아폴로 11호가 지구를 떠난 지 나흘 만인 7월20일 오후 4시17분42초(미국 현지 시각 기준)에 달 표면에 착륙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달착륙 보도에 소개된 내용들이다.
착륙지점은 예정지였던 ‘고요의 바다’ 남쪽 7.4km 떨어진 지점이었다. 착륙한 지 6시간여 만인 오후 10시56분20초에 아폴로 11호의 선장인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왼발부터 내디디며 “이 한 걸음은 작지만 인류에게 위대한 비약이 될 것”이라는 인사를 지구인들에게 보냈다. 암스트롱은 뒤이어 내린 비행사 올드린과 함께 “행성 지구에서 온 인간, 여기 달에 걸음을 남긴다”고 쓴 명판을 세웠다.
두 우주비행사는 달 표면에 체류한 2시간 반 동안 과학관측장치 설치와 암석채집 등을 마치고 비행사 클린스가 홀로 기다리던 사령선으로 되돌아갔다. 착륙 나흘 만인 7월24일 3명 모두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43년이 지나도록 인류가 달 탐사에 나섰다는 기록은 없다. 지난 2009년 유인 달 탐사 40주년을 맞아 지구촌은 1969년 아폴로11호의 유인 달 탐사가 조작됐다는 논란으로 뜨거웠다. 무중력상태에서 성조기가 펄럭였다는 것부터 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귀환한 모선에 복귀 경로 등 의혹은 무성했다.
듣고 보니 이상하다. 43년 전 달 탐사가 이뤄졌는데 그 이후 한 번도 추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탐사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것인지, 어떤 이유로 추가 탐사 사실을 숨기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1951년 압둘라 요르단 국왕 암살
1951년 7월20일 요르단 국왕 압둘라 1세가 암살당했다. 압둘라 1세는 나흘 전 암살당한 국무총리의 장례식장에서 애도문을 낭독하다 팔레스타인 청년이 쏜 총탄 3발을 맞고 사망한 것이다. 향년 69세였다.
그는 재위 기간에 친서방적이고 온건한 외교를 펼쳤지만 이 때문에 다른 아랍국가들의 반발을 샀다. 암살범은 요르단이 아랍 국가들을 제외한 채 독자적으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을 진행하는 데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
압둘라 1세의 곁에 서 있던 그의 손자 후세인 왕자가 곧바로 범인을 붙잡았다. 이 과정에서 왕자는 범인이 쏜 총탄 한 발을 맞았지만 가슴에 차고 있던 메달이 총알을 막아 목숨을 건졌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