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9일] 버마 독립운동지도자 아웅산 암살당한 날

2010년 노벨평화상 탄 기후학자 슈나이더 타계

지난 2010년 7월19일 지구온난화에 관한 국제연구단 소속으로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함께 2007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던 미 국립대기연구소 기상학자 스테픈 슈나이더(Stephen Henry Schneider) 스탠퍼드대 교수가 사망했다. 65세 였다.

스웨덴 케링괸(K?ring?n)에서 열린 과학자 회의를 마치고 스톡홀름에서 출발한 런던 행 비행기로 돌아오던 중 폐색전증(pulmonary embolism) 증세를 보이다가 갑자기 숨진 것이다.

슈나이더 교수는 수십년간 기후변화에 대해 연구하면서 기후변화가 미국의 야생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나아가 정치와 정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수많은 책을 저술했으며, 보험산업과 농업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 결정을 돕기 위해 기후변화의 영향력 계량화에도 선도적 구실을 했다.

그는 생전에 “가장 보수적인 예측으로 21세기에 예상되는 기온 4도 상승은 인간이 적응할 수 없는 기후 변화를 의미한다”면서 “그런 변화가 자연적으로 이뤄지는 데는 만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지금 예상되는 것처럼 100년 안에 이런 변화가 발생할 경우 인간이 그런 기후 조건에 적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기상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고 덧붙였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 고문을 지냈던 그는 백혈병의 일종인 맨틀 세포 림프종이라는 을 앓았다. 2005년 자신의 투병 생활을 그린 <지옥에서 온 환자>라는 책을 냈으며, 이 투병의 경험이 그가 기후변화의 우울한 전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도록 했다고 말해왔다.

2010년 중국 에너지 소비량, 미국 추월

2010년 7월19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은 “중국이 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이 됐다”고 비중 있게 보도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집계에 따르면, 2009년 중국의 에너지 소비는 22억5200만 석유환산톤(TOE, 1 TOE는 석유 1t의 발열량)으로, 사상 처음으로 미국을 앞질렀다. 2000년 당시 중국의 에너지 소비량은 미국의 절반 수준이었다.

에너지 소비량에는 석유·석탄·천연가스 등 화석연료와 원자력, 수력 등의 씀씀이가 포함된다. 당시까지 최대 에너지 소비국이던 미국은 2009년 중국보다 4% 적은 21억7000만 TOE을 사용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중국의 1위 부상이 에너지 전문가들의 예상보다 5년 빠르다고 전했다. 중국은 그러나 석유는 미국보다 훨씬 덜 썼다. 중국의 1일 석유소비량은 920만 배럴로, 미국의 1900만 배럴에 견주면 절반에도 못 미쳤다. 대신 석탄을 많이 썼다.

중국 국영 석유기업들은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서 서구 기업들과 치열한 석유 확보전을 벌이고 있다. 중국해양석유총공사는 2005년 미국 석유업체 유노칼을 인수하려다 정치적 반대로 단념하기도 했다. 최대 석유 수출국 사우디아라비아는 2009년 처음으로 미국보다 중국에 더 많은 원유를 팔았다.

에너지 수급이나 가격 못지않게 온실가스 배출 문제도 에너지 소비대국 중국에 더 큰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2007년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미국을 능가했다. 그러나 미국과 마찬가지로 세계적 온실가스 감축 약속인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지 않고 자체적 감축에 나서겠다고 주장해왔다.

중국의 영향력 있는 위원회인 국가개발 및 혁신위원회(National Development and Reform Commission, NRDC)는 2012년 7월 초순 “중국 정부가 자발적으로 배출권거래제를 자국내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007년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

2007년 7월19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카불에서 칸다하르로 향하던 23명(여자 16명, 남자 7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탈레반 무장 세력에 납치됐다.

탈레반은 피랍된 23명 중 심성민과 배형규 목사를 살해했다. 한국 정부와 탈레반의 협상 결과 다른 인질 21명은 그해 8월31일(KST)까지 단계적으로 모두 풀려나 피랍사태는 발생 42일 만에 종료됐다. 같은 해 9월2일 생존한 피랍자 19명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피랍자들과 해외 위험지역에 선교를 하고다니는 일부 개신교도들은 비판을 받았다.

2000년 푸틴 러시아 대통령 북한 방문

2000년 7월1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박2일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러시아는 10여년 지속해온 대북 냉각기를 끝내고 소련 붕괴 후 소원했던 전통적 동맹국과 이해 당사국과의 관계강화를 꾀했고, 그것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푸틴의 북한 방문은 소련과 러시아를 통틀어 최고 지도자로선 처음이다. 푸틴은 더욱이 취임 후 한국보다 먼저 북한을 방문했다.

북한과 러시아는 이번 회담에서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위(NMD) 반대 등 세계적 문제▶시베리아 천연가스관의 북한 경유▶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남북한 철도 연계 등을 다뤘다.

푸틴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중국과 북한을 NMD 체제 구축 반대와 미국 패권주의 반대진영에 합류케 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소련 붕괴 이후 최초로 미국에 대응해 러중북이 하나의 축에 서는 듯한 부수적 성과를 올리게 됐다.

또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통해 북한에 이미 엄청난 돈을 퍼부은 미국에 맞서 소련이 이전에 북한에 건설했던 공장들의 재가동과 에너지.교통협력.대북채권 재조정 등을 통해 경제적 영향력을 나름대로 확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북한은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지도력을 보다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한국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그리고 푸틴과 정상회담을 잇따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국제사회가 인정한 지도자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 것이다.

1947년 버마 독립운동 지도자 아웅산 암살

1947년 7월19일 버마 독립운동 지도자 아웅산(Aung San, 1915.2.13~1947.7.19)이 양곤의 회의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중 동생을 포함한 6명의 행정참사회원과 함께 암살당했다.

중부 버마의 마구에현(縣) 나마우시에서 출생한 아웅산은 1932년 양곤대학에 입학, 1936년 동맹휴학을 지도했다. 같은 해 버마 전국학생연합의 초대 서기장에 뽑혔고, 1938년에는 독립을 표방하고 나선 급진정당인 타킨당에 입당, 서기장이 됐다.

영국 당국의 체포령이 내리자 1940년 8월 일본으로 탈출, 버마 공작기관의 스즈키(鈴木) 대좌(大佐)의 원조를 약속받고 하이난(海南)섬에서 버마독립군을 양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버마 독립의용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함께 버마에 침입, 바 마우가 이끄는 임시정부(1943~1945)의 국방장관이 됐다. 1944년 8월 반(反)파시스트 단체인 인민자유연맹(AFPFL)을 조직, 1945년 연합군의 반격에 호응해 일본군과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후 AFPFL의 총재가 되어 총독의 행정참사회에 참가했고,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C.애틀리와 아웅산 간에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얀마독립을 위한 제1보를 내디뎠다.

1949년 라오스 프랑스로부터 독립

1949년 7월19일 라오스가 프랑스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1945년 인도차이나 반도를 지배했던 일본이 패망하자 라오스는 급격히 혼란해졌다. 라오스의 독립파는 라오이싸라, 즉 공산정당을 만들어 라오스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라오이싸라는 베트남 공산정권인 베트남민주공화국과 긴밀하게 유대했다. 프랑스와 라오스 독립파의 전쟁은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1949년 프랑스는 라오스를 독립시켰지만 국방, 외교, 재정권을 프랑스가 가졌다는 점에서 형식적인 독립이었다.

곧바로 우익과 좌익의 대립이 시작됐다. 우익 지도자는 라오스 왕국의 총리가 된 ‘수바나 푸마’였고 좌익의 지도자는 ‘수파누봉’이었다. 1950년 라오스의 공산세력이 뭉쳐서 파테트 라오가 탄생했다. 내전은 계속 심해졌고 결국 1954년에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라오스의 왕실 유지, 파테트 라오가 참여하는 정부 수립을 골자로 평화 조약이 맺어졌지만 중립은 실패하였고 다시 내전이 시작됐다.

1970년대에 들어서 파테트 라오의 공격이 계속 심해져 라오스 정부는 계속 밀리게 된다. 다시 평화 조약이 맺어졌으나 1975년 남베트남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망하고 라오스 국왕과 수바나 푸마가 물러나면서 좌익 성향의 정부가 수립된다. 파테트 라오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라오 인민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30년 동안에 걸친 라오스 내전은 완전히 종식되었고 라오스는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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