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4일] 이라크 7·14 혁명

2008년 미스 유니버스 2008 대회

2008년 7월 14일 제57회 미스 유니버스 대회가 베트남 냐짱 다이아몬드 베이 리조트 크라운 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됐다. 미국의 유명한 쇼 호스트인 제리 스프링거와 스파이스 걸스의 전 멤버였던 멜라니 브라운이 맡았다. 80개국의 참가자가 경쟁을 벌였다.

미스 유니버스 2008의 티아라는 CAO사가 만든 스페셜 에디션으로 올해 우승자에게만 씌여졌다. CAO사의 티아라는 12만 달러에 이르며 꼬냑 다이아몬드, 18k 금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스 이집트 야라 나오움은 무대 뒤에서 미스 유니버스 2007인 모리 리요의 뺨을 때려 물의를 일으켰다.

미스 유니버스 2008 진으로 선정된 베네수엘라의 다야나 멘도사는 이듬해 8월23일 같은 나라 후보인 스테파냐 페르난데스에게 왕관을 넘겼다. 베네수엘라 여자가 예쁘긴 예쁜가보다.


1996년 일 우익단체, 조어도에 등대 설치

1996년 7월14일 일본 오키나와[沖繩]에서 300㎞, 타이완[臺灣]에서 200㎞ 떨어진 동중국해(東中國海) 남부의 섬 조어도에 일본 우익단체 ‘일본청년사’가 상륙해 높이 5미터의 등대를 설치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중국과 타이완은 즉각 철거를 요구하며 강력 항의했다. 중국과 홍콩에서 수천 명이 반일 시위를 벌이고 타이완에서는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전개한다.

조어도는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난 1894년부터 중국과 일본 사이에 영유권 분쟁이 계속돼 온 섬이다. 동중국해 남서부에 위치한 다섯 개의 무인도와 세 개의 암초로 구성된 군도로, 타이완과 류큐 제도 사이에 있다. 현재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으나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센카쿠 열도(尖閣列島, 첨각 열도)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댜오위타이 군도(??台群?), 대만에서는 댜오위타이 열서(釣魚台列嶼)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피너클 제도(Pinnacle Islands)라 부른다. 1884년 영국 해군이 이 군도를 피너클 아일랜드(Pinnacle Islands, 뾰족한 섬)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센카쿠(尖閣, 첨각)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조어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은 이듬해 1997년 11월 중국과 일본이 조어도 문제를 제외시킨 새 어업협정에 서명하면서 가라앉았지만 분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다.

1958년 이라크 ‘7·14 혁명’

1958년 7월14일 이라크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뒤엎었다. 이른 바 ‘7·14 혁명’이다. 당시 이라크는 현 요르단 왕실과 한 뿌리인 하솀 왕가가 다스리고 있었다. 하솀 왕가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계보라 주장했지만 왕정이 탄생한 것은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1932년 파이잘 1세 국왕이 즉위하면서였다.

당시 아랍권에는 ‘범아랍주의’로 표현되는 민족주의 정서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라크인들은 왕정을 서방의 괴뢰정권이라 보았다. 실제로도 왕정은 외국 석유회사들에 유전 이권을 넘겨주기 바빴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이 다시 이라크를 점령, 47년까지 통치했기 때문에 국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2차 대전 뒤 유럽이 불황을 겪자 이라크 경제도 침체에 들어갔다. 물가가 치솟고 삶의 질이 떨어졌다. 왕정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은 갈수록 높아졌다.

누리 알 사이드 총리는 이라크석유회사(IPC)의 수입 70%를 이라크 정부로 귀속시키고 인프라 투자를 늘리자고 했으나 정부의 ‘외국인 자문단’은 이를 거부했다.

karim qasim

1955년 이라크는 이란·파키스탄·터키와 ‘바그다드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의 압력으로 만들어진 지역안보동맹체제였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계기로 반(反)서방 운동이 거세지면서, 미국의 의도와 달리 중동의 민족주의 흐름은 더욱 커졌다.

1958년 초 이집트·시리아·요르단의 ‘아랍연합공화국(UAR)’이 출범했다. 이에 고무된 이라크 ‘자유장교단’은 7월14일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뒤엎은 것이 ‘7·14 혁명’이다.

파이잘 2세 국왕과 압둘 일라 왕세자, 왕실 측근이던 알 사이드 총리는 살해됐다. 혁명을 이끈 압둘 카림 카심은 이집트 가말 압둘 나세르의 범아랍주의를 추정하는 ‘나세리스트’였다.

카심의 새 정권은 바그다드 협정을 탈퇴하고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했으며 공산당 창당을 허용하고 석유산업 국유화를 추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1963년 바트당을 지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카심을 몰아냈다. 사담 후세인은 1969년 바트당의 2인자가 됐고 1979년 대통령이 됐다. CIA는 후세인이 90년대 미국에 반항할 때까지 충실히 그의 정권을 지원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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