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2일] 드레퓌스 무죄 선고일, 30년 뒤엔 사망일
2011년 중국 보하이만 해상유전 잇단 원유유출
2012년 7월12일 한국 서해에 가까운 중국 보하이만의 해상 유전에서 원유 유출 사고가 잇따랐다.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날 12일 새벽 1시30분께 중국 랴오닝성 해상에 있는 쑤이중 36-1 유전의 중심 플랫폼에서 제어장치 고장으로 원유가 유출돼 인근 해역 1㎢가 오염되고 유전 전체의 생산이 중단됐다고 중국 국가해양국이 발표했다. 이 유전을 운영하는 국영 중국해양석유(CNOOC, 중해유)는 0.1~0.15㎥의 원유가 유출됐으며 작업선을 파견해 기름을 제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날 사고는 역시 중해유가 운영하는 산둥성의 펑라이 19-3 유전에서 6월4일과 17일 대규모 원유 유출 사고가 일어난 데 이어 두달 새 3번째 사고였다. 쑤이중 유전은 펑라이 유전에서 약 150㎞ 떨어져 있다.
펑라이 유전 사고에 따른 기름 오염 면적은 처음에는 840㎢로 조사됐으나, 국가해양국이 최종적으로 밝힌 결과 전체 오염 면적이 4240㎢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다. 이는 서울시 면적의 7배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중해유는 사고 뒤 한 달 가까이 국가해양국에도 보고하지 않고 쉬쉬했다. 그러다가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에 기름띠 오염 사례들이 폭로된 뒤에야 사고를 공개해 비판에 휩싸였다. 그러나 중국정부 발표 이후에도 정확한 유출량과 사고 원인을 밝히지 않았다. 중국 국가해양국은 바로 이튿날인 7월13일 펑라이 19-3 유전의 플랫폼 2곳에서 원유생산을 중단하라고 중해유측에 명령했다.
잇따른 사고는 석유를 너무 빨리 뽑아내려고 한 탓으로 전해졌다. 중국의 매년 원유 생산량 증가분 중 중해유의 해상 유전 생산 몫이 약 50%를 차지하므로, 생산 속도에 큰 압박을 받아온 것으로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중해유 내부 인사는 <신경보>라는 신문 기고를 통해 “매년 5000만t의 석유·가스 생산량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큰 압박을 느끼고 있고 안전 문제가 커졌다”고 밝힌 바 있다.
2007년 리비아에서 ‘에이즈 감염혈액 수혈 사건
2007년 7월12일 리비아 대법원은 에이즈 바이러스 오염 혈액을 어린이 환자들에게 수혈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불가리아 출신 여성간호사 5명과 팔레스타인 의사 1명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에 따라 이들의 사형은 확정됐지만 피해 어린이 부모들이 유럽연합이 내놓은 보상안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져 간호사 등은 모두 구명될 것으로 예상됐다.
리비아의 벵가지아동병원에 근무하던 피고인들은 이 병원에서 치료받던 어린이 438명에게 HIV 오염 혈액을 수혈한 혐의로 1,2심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 받았다. 상고심에서도 사형이 확정된 것이다.
검찰은 이들이 에이즈 치료법 실험을 위해 어린이들에게 HIV 혈액을 수혈한 혐의로 기소했고, 피고인들은 병원의 위생상태가 나빠 빚어진 사고였다며 무죄를 주장해 왔다. 이날까지 오염 혈액을 수혈 받은 어린이 가운데 56명이 사망했다. 그 뒤 몇 명이 추가로 사망했는지 후속보도가 전혀 없다.
이 사건은 아직도 그 배경과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끔찍한 영구미제사건이다. 악마가 있다면 인간과 다른 형상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1997년 체 게바라 유해 쿠바 송환
1997년 7월12일 쿠바 혁명의 지도자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유해가 볼리비아 중남부지역의 활주로에서 발견된 후 매장을 위해 제2의 조국 쿠바로 옮겨졌다. 아르헨티나에서 출생한 게바라는 멕시코에서 쿠바인인 카스트로 형제(피델·라울)를 만나면서 전 세계적인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조금씩 실현시킬 수 있었다. 1959년 1월2일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킨 카스트로 군대가 수도 아바나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세운 뒤, 게바라는 쿠바 시민이 됐다. 게바라는 카스트로 정권에서 국가 농업개혁연구소의 산업부장, 쿠바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했다. 1965년 4월 이후 게바라는 다른 쿠바의 전사들과 함께 콩고로 가서 내전에 참전한 파트리스 루뭄바 부대의 조직을 도왔다고 알려져 있다. 1966년 가을부터는 볼리비아로 잠입해 산타크루스 지역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통솔하다가 1967년 10월9일 생포된 뒤 총살당했다. 게바라의 유해는 쿠바 산타클라라 기지의 쿠바 혁명지도자 기념비 아래에 묻혔다.
1906년 프랑스 최고재판소, 드레퓌스에 무죄 선고
1906년 7월12일 프랑스 최고재판소가 독일 스파이 혐의로 체포(1894년)돼 군사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던 드레퓌스(Dreyfus, Alfred) 대위에 대한 재심을 열고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7년 전 영국으로 망명한 에스테라지 소령이 자신의 소행이라고 밝혔음에도 권위가 실추될 것을 우려한 프랑스 군사법원은 계속해서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해왔다. 이날의 무죄판결은 그동안 유태인인 드레퓌스에 대한 군대내의 편견과 선입견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프랑스 법원의 양심을 드러냈다.
드레퓌스 대위는 1894년 12월22일 군사기밀을 독일에게 팔아넘겼다는 혐의로 프랑스 군사법원으로부터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단지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사건은 에밀 졸라가 <나는 규탄한다>는 6단짜리 기고문을 파리의 <여명>이라는 조간신문에 게재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집단적 편견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 드레퓌스를 구해낸 프랑스 지식인의 집단적 저항은, 지식인의 양심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한편 드레퓌스는 최종 무죄판결을 받은 그날로부터 꼭 30년 뒤인 1935년, 같은 날짜인 7월12일 죽었다. 우연치고는 묘하다.
이상현 기자 ?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