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은잔이 왜 하필 거기에?
창세기 44장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창 44:1-2)
요셉은 지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요? 뼛속 깊이 사무친 상처와 서운함을 이런 식으로라도 풀고 싶었던 것일까요?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용서는 일방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용서해 달라고 빌지 않아도, 내 마음의 결정만으로 가능한 것이 용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형들입니다. 자신들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아직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형들을 용납한 것을 형들 또한 용납할 수 있게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들에게도 과정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계기가 필요합니다. 형들이 그 과정을 밟아갈 수 있도록 시간을 마련해 주고,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기쁨을 형들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가족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죄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형들은 아직까지 20년 전의 그 구덩이에 빠져 있었습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린 이후, 자신들도 죄의 구덩이에 빠져서 20년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요셉의 눈에 보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꺼내 주고 싶었습니다.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형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뉘우치는 것입니다. 회개입니다. 회개한 사람만이 용서를 누립니다. 뉘우친 사람만이 용서받은 기쁨을 만끽합니다.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는 것은 죄로부터 풀려나기 위한 첫걸음마입니다.
애굽에 식량을 구하러 가서 생긴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요셉의 형들 사이에서 과거의 일이 비로소 공론화됩니다. 그리고 동생을 판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이었는지를 서로 확인하고 자백하며, 죄값을 단단히 치르겠다는 진지한 각오가 섭니다.
물론 이런 과정 없이도 용서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실 확인일 뿐입니다. 그렇게 받은 용서는 결코 기쁘지 않습니다. 죄로부터 풀려나는 자유를 맛보지도 못합니다. 감동도 감격도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용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한 사람에 한하여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의 죄를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때로 내 보따리에 은잔을 넣어두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