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 시가 있는 풍경] ‘가을과의 작별’ 이병철

사진 이병철

남은 볕살 속을 걸어
네게로 간다

네게 가닿기 전엔 아직 나의 가을과 작별 인사를 나눈 게 아니므로
하얗게 핀 억새꽃 홑씨처럼 흩날리고
향기 아리던 감국(甘菊) 노란 꽃잎을 지우는 언덕을 지나 그림자 짧아진 햇살을 쫓아 네게로 간다

갈잎 울창하던 숲길에는
벗은 가지들의 시린 발치를 잎새들의 이불로 덮고 있다

수십 번의 가을을 이리 맞고 보내면서도
여태껏 가을과의 작별 인사 한번 변변히 나눈 적이 없었다

가을의 마지막과 겨울의 첫 시작 그 경계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여름 한복판에서부터 미리 앞당겨 가을을 앓으며
어느새 가을 다 가면 어쩌나 자꾸 저문 들녘만 서성거리다가
문득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발견하곤 하였다

하나의 문을 여는 것은 다른 하나의 문을 닫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눈 소식을 애달프게 기다리면서도
차마 한 계절의 문을 닫지 못하였다

정수리에 시린 눈을 이고도 사계를 품은 저 히말의 설산처럼
가을이 저무는 그 끝자리에서 더 깊은 가을을 품은 너를 만나기까진
그렇게 저무는 가을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드러난 것 가운데 다시 사라지지 않는 것 없으며
존재하는 것 가운데 그냥 사라지는 것 또한 없다는 것을
그러므로 내가 작별 인사를 하기 전엔 아직 나의 가을이 끝난 게 아니었음을 알아 저문 가을 한 줌 볕살 속을 걸어 내가 네게로 간다

네게 가닿기 전엔
아직 나의 가을이 다 가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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