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 인촌 김성수를 위한 변명

인촌 김성수와 우남 이승만(오른쪽)


대한민국 세운 건국영웅 김성수를 기리는 판소리 책 출간

6.15 남침 불발에 그치게 만든 요인 중 하나 농지개혁에도

지난 3월, 인촌 김성수의 삶을 판소리와 희곡으로 만든 책이 출간됐다. 제목은 <건국영웅>(춘추관 발간). 장편 <하의도>를 쓴 김남채 작가가 인촌의 삶을 소재로 펴냈다. 인촌이 평생 실천한 좌우명 ‘공선사후, 신의일관’은 동아일보 편집국 벽에도 붙어있다.
“공선사후를 신조로 민족 산업과 언론, 교육에 자산을 과감히 투척했다”(김남채) 김남채는 “판소리로 인촌의 진가를 알리고, 연극 무대에 올리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한다. 173쪽 책은 판소리와 희곡 2장르로 돼있다.

첫 대목은 인촌이 필생의 지기인 고하 송진우와 함께 일제 때 도쿄로 가는 장면이다. 신학문을 공부하기로 결심하는 데서 시작했다. “나라 앞날이 걱정이다”는 말을 남기고 타계하기까지 인촌의 일대기를 책은 압축했다. 희곡은 광복 이후를 다룬다. “인촌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책 제목을 ‘건국영웅’이라고 붙인 이유다.

전북 고창 출신의 인촌은 일제 때 경성방직을 설립한다. 이어 고하 등과 함께 기미년 독립운동 후 일제가 유화노선을 걷자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앞서 중앙고보·보성전문(현 고려대)을 인수한다. 언론을 비롯한 사업과 인재 양성의 교육에 몸을 바친 데 이어 해방 후 한민당을 창당한다. 이시영 선생에 이어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다.

인촌의 건국정신은 농지개혁 단행과 제헌헌법 기초 과정에서도 오롯이 빛을 발한다. 인촌은 UN 감시 하 자유총선거로 한반도 문제 처리가 가닥을 잡자 정부수립이 임박한 것으로 판단한다. 유진오 박사에게 헌법초안 작성을 의뢰한다. 반만년 간 헌법이 없던 나라에서 헌법을 제정한다는 건 혁명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대표적 공법학자 유진오는 각국의 헌법 제도와 임정 헌법, 약헌, 강령 등을 두루 살핀다. 한국 실정에 맞는 헌법초안을 윤길중 등 전문위원들과 협의하면서 다듬고 기초했다.

초안의 마무리 단계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하나는 대통령제냐, 내각제냐의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경자유전의 원칙을 헌법에 명시해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정부형태야 윗물들만의 관심사다.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건 그야말로 뜨거운 이슈다. 다수의 농민이야 찬성할 테지만, 소수지만 강력한 지주들의 반발이 그믐밤 불빛이다. 농지개혁 방법과 소유 내용, 한계를 법률로 정한다는 규정을 헌법에 넣느냐의 문제다.

인촌 김성수 <사진 연합뉴스>

인촌 가문의 농지소유 면적은 3247정보였다. 조선에서 가장 넓은 농지 소유주가 바로 그다. 농민에게 농지를 분배하자는 헌법 조항은 중대한 사유재산 침해다. 지주계급의 반발은 물론, 법리적으로도 논란이 첨예할 수밖에 없다. 제2차세계대전 후 시대의 요청으로 필리핀과 브라질도 농지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사유재산 침해를 이유로 지주들 반대가 극렬해서다. 그 선례들로 미뤄볼 때 농지개혁이야말로 건국이 몰고 온 최대의 변혁이 아닐 수 없다. 

지난 7월 제헌절 75주년 때 서울 종로 북촌의 인촌 고택에서 인촌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우리가 모인 이 사랑채에서 유진오와 김성수는 요담을 나눴다. 농지개혁 없이는 공산당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선전하면서 농민들에게 파고드는 공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진오는 인촌 선생에게 농지개혁 조항을 헌법에 포함시키는 것에 동의하기를 건의했다.”(이영일 전 국회의원)

아무리 인촌이 마음 넉넉한 대인배라도 결단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울산 김씨 인촌 가문이 소유한 3247정보의 농지 가운데 3정보만 남긴다. 3244정보는 증권을 받고 국가에 넘긴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한다면 참으로 희생적 결단이 아닐 수 없었다.

과연 어느 누가 그런 희생을 쉽게 감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촌은 숙고 끝에 제의에 동의한다. 인촌의 동의는 바로 한민당의 동의였다. 전체 지주세력 동의를 끌어낸 기폭제이기도 했다. 참으로 살신성의의 결단이 아닐 수 없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 7월 15일 제주포럼에서 실시한 강연 때도 인촌을 상찬했다. 강연은 사이버공간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요지는 한국의 빠른 경제 발전은 1950년 이승만 정부의 ‘혁명적 농지개혁’이 디딤돌이라는 거다.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농이 땅을 갖게 됐다. 일부 대지주는 기업인으로 변신, 산업 발전의 초석을 닦게 되는 선순환의 혁신이다. “국가 정책은 ‘선한 의도’가 아닌 ‘선한 결과’가 중요하다”(한동훈)

인촌은 동아일보 지면으로도 농지개혁을 도왔다. 그에게 친일 꼬리표를 붙이려 드는 일부세력들은 이런 인촌을 제대로 알고 하는지 궁금하다.

역사학자 이승렬은 2년 전, <근대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그물)을 펴냈다. 800쪽 넘는 대작이다. 나는 여지껏 그 책을 독파하진 못했다. 저자 이승렬은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다. 이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했다. 놀랍게도 대한민국 건국의 중심으로 인촌 고하를 비롯한 ‘호남개혁지주’ 계급을 꼽는다. 전라도의 남과 북이 만나는 줄포항 주변에서 났다. 이곳의 크고 작은 지주 가문 출신들이 인촌과 고하, 근촌 백관수, 가인 김병로 등이다.

이들은 인촌의 장인 고정주가 설립한 소학교에서 영어 등 신학문을 배운 바 있다. 고정주는 호남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3부자가 순국한 집안 출신이다. 60 노구를 이끌고, 칼 한번 잡아보지 못한 먹물 선비가 의병장을 했다. 그의 11대 직손이 조선 말기에 규장각 직각(국립도서관장)을 지낸 고정주.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로 깜빡이다 마침내 일제의 손아귀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낙향한다. 향리 담양에서 호남의 준재들을 가르친다. 고 직각의 가르침으로 눈을 뜬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는 신학문을 배우러 일본에 함께 가게 된다.

중국 일본도 이루지 못한 자유주의 기초를 세운 주역이 고하와 인촌이다. 책에서 이승렬은 소신을 꿋꿋하게 피력한다. “인촌을 필두로 한 부르주아지 2세대, 즉 시민은 두 가지 측면에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였다.” 하나는 앙시앙레짐인 조선의 관료제였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 정권이라고 못 박았다. 국민주권과 공화정치, 보편주의를 중시했다.

두 가치가 결여된 민족주의는 통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국민과 민족을 분열시킨다. 폭력과 억압의 도구로 변질된다는 일침을 가한다. 필자는 3·1운동을 그 전환점으로 본다. 그때 싹 틔운 국민주권과 공화정치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고 본다. 3.1운동은 태화관에 모인 33인만이 주역이 아니다. 어찌 보면, 그들은 얼굴마담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태극기를 손에 치켜들다 숨져간 이름 모를 평민들이 참 주역이다. 중앙고보 숙직실에서 밤마다 모의한 20대 청년들도 있다. 미국에서 우남이 민족자결주의를 비롯한 국제 정세를 전했다. 귀를 기울인 인촌 고하 설산 등이 일제 때 자금과 인력의 집산지였던 천도교 손병희를 비롯한 각계와 접촉한다. 3.1운동의 산실 중 하나가 중앙고보 숙직실이라는 일각의 평가도 있다. 

건국 75년 만에 일본을 능가할 정도로 경제뿐 아니라 문화예술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한강의 기적’은 호남의 양식 있는 지주계급이 초석을 놓았다. “동학운동 이래 농민 중심의 민족해방을 강조해온 민족주의 좌파 역사관은 설자리를 잃었다.”(이승렬) 백두혈통 운운하며 핵 무장으로 동북아 평화 안정을 위협한다. 모험주의로 치닫는 3대 세습 북은 정치적, 도덕적 파산 상태다. 민족주의 좌파 역사관이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린 광경이 보인다.

일제가 없었다면 위로부터 근대화가 가능했을 거라고 민족주의 우파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논리가 박약하거나 시대착오라고 필자는 반박한다. 자본주의가 일본 식민지에 의해 이식됐다는 실증주의적 식민지근대화론도 비판한다. 그 논리 대로면 일제 후 독재정치까지 정당화하는 잘못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서란다. 자민당 독주 일본과 좌-우가 정권을 교대한 민주국가 한국의 차이도 설명할 수 없다.

<독재와 민주주의 기원>을 쓴 베링턴 무어에게 주목한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유럽사를 보면 이런 포인트가 명확하다는 거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집착한 프랑스는 내전과 전쟁에 시달린다. 위로부터의 개혁에 주목한 독일은 전체주의 망령에 사로잡혔다. 영국이 홍역을 치르지 않고 민주주의를 구가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래도 위도 아닌 중상층계급(부르주아지)이 자유주의 개혁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이 사관이라면 동북아에선 중국이 프랑스를, 일본이 독일 노선을 좇았다고 볼 수 있을까? 한국은 무혈의 영국 발자취를 좇는 슬기를 발휘했다. 그 중심에 인촌과 고하를 비롯한 호남개혁지주들이 있었다.

한편 대법원은 친일인명사전을 겨냥한 인촌 가문의 재판에 패소판결을 내렸다. 이에 인촌 가문은 ‘서훈 박탈 무효소송’을 대법원에 상고해 계속 다투는 중이다. 인촌에게 씌운 그 낙인이 어서 지워지길 바란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