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열 전 유엔대사 “윤 대통령 균형과 통합, 미래 준비하는 혜안의 지도자 되길”
필자는 주유엔대사 시절 유엔평화구축위원회(PBC)와 유엔개발계획(UNDP) 집행이사회 의장 자격으로 각각 감비아와 콜롬비아를 방문해 독재정권 몰락과 내전 종식 후 화해와 치유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그 과정에서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 적이 있다. 내전의 상흔이 아직 뚜렷이 남아있는 콜롬비아 내지에서는 한 마을에 함께 어울려 살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 고통과 희망의 얘기를 들으며 진한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내전이나 권위주의적 통치가 종식된 지역에서 어두운 과거사에 대한 진실 규명과 가해자와 피해자간 화해를 통해 이룩한 평화와 정의를 ‘전환기적 정의’(transitional justice)라고 부른다. 악명높은 인종차별정책 종식 후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립해 이를 성취한 남아공이 대표적 성공 사례다. 우리도 6.25 전쟁과 권위주의 정권,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과거사 청산을 위해 엄청난 정치, 사회적 비용을 치르며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 우리 사회는 이제 막 내전을 끝낸 나라를 방불할 만큼 심각한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다. 민주화를 이룩한 지 한 세대가 지난 후에도 청산해야 할 과거가 남아 있어 전환기적 정의 구현에 목을 매고 있는 듯한 나라, 그것이 불과 몇개월 전까지 우리의 모습이었다. 적폐청산이라는 정치적 구호로 민주적 제도와 절차를 통해 구현해야 할 정의를 마치 과거사 청산을 위한 전환기적 정의인 양 정치권이 호도한 결과다.
그로 인한 우리 사회의 갈등의 골은 생각보다 넓고 깊다. 따라서 치유와 통합을 위한 해법도 전환기적 정의 구현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참고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어려운 일은 정의와 평화 사이에 균형을 찾는 것이다. 정의를 실현하려 하면 평화를 얻기가 어렵고 평화를 지키려 하면 정의 구현이 어렵다. 그래서 다다른 결론은 진실은 규명되고 정의는 세워져야 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평화를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갈등도 진실을 밝혀 정의를 세우되 궁극적으로는 화해와 통합을 이루어 내는 방식으로 극복돼야 하며, 이걸 해내는 것은 상당 부분 지도자의 몫이다.
지금은 난세다. 난세의 지도자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현실과의 조화를 통해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 내는 지도자여야 한다. 미래를 내다보며 급변하는 대내외환경을 담대하게 헤쳐 나갈 용기와 식견, 지혜와 통찰력을 갖춘 지도자여야 한다. 신냉전 시대라고 불릴 만큼 국제질서가 요동을 치는 대변환의 시대에 우리만 갈등과 분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수는 없다.
필자는 최근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의 일대기를 읽으며 고하야말로 오늘과 같은 난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해외보다 더 어려웠을 국내를 지키며 민족 진영을 이끄는 중심 역할을 했고, 해방정국의 혼란기에도 균형을 잃지 않고 국론통합을 위해 애쓰다 타계한 분이기 때문이다. 192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그의 국제정세론 ‘세계 대세와 조선의 장래’는 지금 읽어도 눈이 밝아지는 걸 느끼게 되는 번뜩이는 혜안의 논설들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필자는 TV 방송에 출연한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제 더 이상 서로 미워하지 말자”고 답하는 걸 들으며 안도한 적이 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난세를 헤쳐가는 균형과 통합의 지도자, 미래를 준비하는 혜안의 지도자로 역사에 기록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