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8일]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 선종
2003년 이집트 네페르티티 왕비 미라 발견
2003년 6월8일 더 타임스 일요판은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고대 이집트의 최고 미인 가운데 한 명이자 파라오(왕)에 버금가는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전설적 왕비 네페르티티(Nefertiti)의 미라를 찾았다고 보도했다.
요크대학 고고학 연구진은 12년 간의 조사 끝에 이집트 왕가 계곡의 무덤에서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발견됐던 미라가 투탕카멘왕(Tutankhamen, BC 1370~BC 1352)의 양어머니이자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누렸던 여성인 네페르티티 왕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가발 조각들과 뼈의 형태 등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왕이나 왕비의 미라를 만들 때만 사용하는 방식으로 팔이 꺾인 사실을 확인해 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 미라는 지난 1898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에 의해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 속에서 다른 미라들과 함께 발견됐으나 훼손된 상태가 심해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1907년 단 한차례 사진 촬영이 허용된 이래 더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미인이 왔다’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은 긴 목과 높은 광대뼈, 날렵한 콧날을 가져 현대적 기준으로도 손색없는 미인상으로 유명하다. 네페르티티의 남편인 아크나톤왕은 다신교 사회였던 고대 이집트에서 이례적으로 유일신을 섬겼다. 그는 이에 따라 사후 이교도로 몰렸다. 그와 관련된 모든 유적과 유물들은 조직적으로 파괴됐다.
네페르티티 왕비는 아크나톤왕과 거의 동등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아크나톤왕의 사후 약 3년간은 직접 국가를 통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2년 베트남 소녀 킴 푹 양, 미군 네이팜탄에 전신 3도 화상
1972년 6월8일 미군 전투기가 베트남 사이공 근교 트랑 방 마을에 네이팜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쓰러졌고 마을은 불바다가 됐다. 그때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채 알몸으로 울부짖으며 달아나던 벌거숭이의 한 소녀가 카메라 앵글에 포착됐다.
사진은 전 세계에 전송돼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절절히 전했다. 소녀의 이름은 판 티 킴 푹이었고 당시 9세였다. 네이팜탄에 등과 목덜미, 왼팔을 부상당한 소녀는 사이공 인근 코레이 병원으로 후송돼 17번에 걸친 피부이식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정부는 종전 후 이 소녀를 미국을 상대로 싸운 영웅으로 추켜세우며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로 유학을 보냈다. 킴 푹은 1994년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캐나다로 망명했고 1999년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네이팜탄 화염을 피해 알몸으로 달아나던 킴 푹 양의 사진을 찍은 당시 AP통신의 사진기자 닉 우트는 `전쟁의 공포`라는 제목으로 197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632년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 사망
632년 6월8일은 이슬람 예언자이며 성사(聖使)인 무함마드가 사망한 날이다.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상인인 아버지의 죽음으로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아미나도 메디나를 방문하고 오는 중 병에 걸려 사망, 고아가 되었다. 하녀의 손을 잡고 메카로 돌아온 무함마드를 할아버지 아브드 알 무탈리브가 키운다. 할아버지가 죽자 삼촌 아브 탈리브가 키운다.
무함마드는 어린 나이에 삼촌의 무역 활동을 따라다니게 된다. 12세에 무함마드는 삼촌을 따라 시리아로 가서 바히라라는 이름의 경교, 곧 기독교의 수도사를 만난다. 수도사는 “무함마드에게 예언자의 징표가 있다”고 말했다.
이후 목동으로 살던 무함마드는 삼촌의 소개로 한 부자에 고용돼 시리아 지방으로 대상 무역을 했다. 무역은 큰 성공을 거뒀고 샴 지방의 특산품을 구해 메카로 돌아왔다. 과부였던 그 부자는 무함마드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15살이나 어린 그에게 청혼을 했다.
무함마드 나이 25세에 40세 과부와 결혼한 것이다. 결혼생활은 행복했으나 곧 불행이 닥쳤다. 네 명의 딸은 잘 자랐으나 2명의 아들이 잇따라 죽자, 무함마드는 금식하며 사색에 빠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히라 산(山) 동굴에서 명상에 잠긴 무함마드는 “무함마드여, 그대는 알라의 사도이다”라는 계시를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난 것이라고 전파하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최초의 무슬림이 됐다.
3년 뒤 무함마드는 스스로 ‘알라의 사자’라고 칭하고 하늘의 계시에 따라 유일신 알라의 전지전능함, 만물의 창조, 최후의 심판 및 천국과 지옥 등을 주장하고 설교를 시작했다.
잡신을 배격하고 알라 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설교, 부유한 상인들과 기존 다신교 사제들의 미움을 받았다.
622년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갔다. 이른 바 ‘헤지라(성천)’다. 바로 이 해가 이슬람교의 기원이 됐다. 메디나 시대에 이슬람의 예언자이며, 정치적 지배자, 무장(武將)이기도 한 그는 계속 하늘의 계시를 전했다. 630년 메카에 입성, 카바 신전의 우상을 모두 파괴하면서 그는 “진리는 왔고, 거짓은 멸망하였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이슬람 신앙을 포교하는 데는 나라의 힘이 강해야 한다고 믿었다. 정복 전쟁을 계속해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했다. 632년 이슬람교로 아라비아 세계의 정치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원정을 계획하던 중 자연사(병사)했다.
그의 사상은 <꾸란>에 잘 나타나 있다. 이슬람교는 계율이 엄하고, 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며, 종파의 확고한 구분은 있으나 교리의 올바른 본질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신앙이 인간의 생활을 규율에 맞게 지켜준다고 믿고 있다.
1988년에 발매된 인도 출신의 영국 문학가인 살만 루시디는 자신의 소설 <악마의 시>에서 무함마드를 비롯한 이슬람에 대해 비하했다. 이란은 궐석 재판이 진행돼 루시디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루시디는 그러나 이란 밖에 체류하므로 상징적인 사형선고인 셈이다.
2006년에 덴마크 일간지 윌란스 포스텐지에서 무함마드를 테러리스트로 비하하는 만화가 출시되자마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등지에서는 우상 숭배 반대 시위가 잇따랐다. 유럽 대사관 건물에 불을 지르는 사건도 있었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50세 되던 해에 당시 9세였던 아이샤와 결혼했다. 이 중동사회의 모델이 돼 현재에도 미성년 여아가 40~50되는 어른과 결혼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무함마드는 아이샤가 14세 때 성교를 가졌다고 한다.
무함마드가 한 말 중에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이 있다고 하나 이는 근거가 없는 말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실제로 정복지의 이웃 종교에 대해 너그러웠다. 이슬람 개종이 아니라 세금을 징수하는 방식으로 정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징수하는 세금도 기독교 나라인 비잔틴 제국보다 적어서 스스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 무슬림 학자는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에 영어로 “무함마드의 행적은 오해소지 없도록 조심스레 연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무함마드의 행적에 대해 철저히 고증하거나 언행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이슬람교 중앙회 박현봉 선교팀장은 8일 아시아엔(kor.theasian.asia)과의 전화통화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기일이 6월8일이라는 것은 아마도 이슬람력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면서 “우리는 하나님 이외 인간의 행적을 신성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