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19세기, 농민계몽으로 혁명을?

알렉산드르 2세

농업국가 러시아. 이 나라의 혁명기지는 농촌, 혁명주체는 농민이라는 러시아형 사회주의가 다수를 점했다.

1873년 대학생을 비롯한 도시 지식계층이 농민을 사회주의혁명세력으로 만들려고 농촌으로 갔다. 브나르도(v narod) 즉 ‘민중 속으로’ 운동이다.

이 철 모르는 부잣집 아이들이 무슨 짓인가. 우리의 고통과 곤궁을 외면하고 일신의 영달과 가문의 번영에만 혈안인 무리들이 웬일인가.

대학은 뇌물이 판치는 관청의 공무원 되는 돈벌이 수단이다. “그런 니들이 우리 보고 황제에게 반역하라고 부추기다니!” 경찰에 신고, 속속 체포됐다.

암살로 혁명?

1879년 이들 중 일부가 ‘Narodnya Volya’(민중의 자유) 그룹을 결성, 암살을 통하여 농민을 자극->봉기를 유도하려고 했다.

황제 알렉산드르 2세를 살해하여 기염을 토했다. 농민문화는 살상 금기문화였다. 죽음과 살인을 두려워했다. 오히려 등 돌렸다.

혁명운동조직도 동조는커녕 비난으로 일관했다. 암살은 설 자리 잃었다. 점차 시들해지다 소멸했다.

오크라나의 대응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일단 체포했다. 구금은 고문으로, 마침내 자백 끝에 투옥되거나 유형 또는 사형으로 이어졌다.

①유급 정보원(paid informer) ; 정치범 잡으면 명부, 색인카드, 사진첩 만들어 관리한다.

자백서와 반성문을 받은 뒤 정보제공을 협조하겠다고 하면 석방한다. 나중에 거부하면 그걸 보여준다. 이거 공개할까? 2중 인생 계속하고 만다.

그들이 가져온 유인물을 검토해 대신 인쇄해주기도 했다. 첩보도 얻고 순화도 한다.

1912년에만 2만6천명의 정보원이 활동했다. 노동자 월급보다 많은 월 100루블을 지급받는 자도 많았다. 그 과정에서 오크라나 요원의 착복도 부지기수.

②프락치(fraktsiya, 공작원) 침투; 정치사회단체에 잠입, 불법행동을 유도해 잡아들이는 침투 및 조종수법(infiltration and influence). 공안앞잡이(agent provocateur)라고도 한다.

에브노 아제프(Evno Azef)는 여러 직업 전전하다 러시아사회혁명당 창당에 합류, 밀정노릇을 자청했다. 그는 1903년 테러단장을 밀고, 그 자리 차지했다. 1904년 내무장관을 암살, 당의 신뢰를 얻었다.

오크라나에서 이에 격분, 간첩이라고 소문내자 독일로 도주, 1918년 병사하고 말았다.

로만 말리노프스키(Roman Malinovsky)는 강도 및 강간 전과자로 노조 상임비서 때 체포돼 정보원 하기로 하고 풀려났다.

오크라나는 국회(Duma) 의원에 당선시켜 볼셰비키 내 입지를 굳혀줬다. 1912년 레닌의 신임 얻어 중앙위원으로 선출.

그는 당원 인적사항과 회의내용에 대한 정보를 물어다 줬다. 특히 레닌동정(spying on Lenin)에 주력했다. 스탈린을 밀고, 유형 당하게 만들었다.

내무부 경찰국장 연봉보다 많은 4만8천 루블의 보수를 받으며 승승장구했으나 섭섭했던 전 애인이 황제밀정이라고 폭로, 도피하다 1918년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당했다.

③어용노조 운영; 친정부 노조 만들기다. 경찰정보원 출신 오프라나 요원 세르게이 주바토프(Sergei Zubatov)의 아이디어다.

1901년 모스크바 금속노동자 상호부조 조합을 설립, 정치투쟁은 접고 노동조건 향상활동을 하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이를 경찰사회주의(police socialism)이라고도 한다. 주요 도시로 확대시켰으나 3년을 견디지 못했다. 오데사에서의 파업으로 상부에서 사업성과를 의문시했다. 좌천된 후 자살.

기관 간 협조미흡으로 1905년 혁명 초래

1903년 Georgii Gapon 신부는 주바토프와 접촉, 관제(官制) 노조 러시아공장노동자조합을 결성했다.

1904년 12월 말 신부는 노동자 권익향상을 황제에게 청원하는 행진계획을 오크라나 조정관과 상의했다. 내무장관은 관계기관대책회의를 거쳐 묵인하기로 했다. 궁전을 떠나 피신하고 있던 황제에게 걱정 마시라고 보고했다.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원행렬이 황제궁전에 이르렀다. 경비하던 군경이 발포했다.

상부 지시가 현장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탓이었다. 피범벅 일요일(Bloody Sunday)이 됐다. 1905년 혁명으로 이어졌다. 실패.

그러나 이제까지의 “황제는 우리 편이다. 주변의 고관대작이 우리를 괴롭힌다”라는 믿음이 싹 가셨다. 역시 주범은 황제구나! 라는 쪽으로 민심이 돌아섰다.

타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1917년 혁명의 예행연습을 한 형국이 됐다.

러시아 데카브리스트

참고로 러시아제국시대 암살 현황은 다음과 같다.

혁명조직 암살단이 대상자 선정, 재판 열어 사형여부 결정하고 실행했다. 최초의 자폭테러도 등장.

△1878년 8월 4일 관방3부장 Nikolai Mezentsov
△1879년 2월 카르코프 주지사 Dmitri Kropotkin
△1881년 3월 11일 황제 알렉산드르 2세-자폭테러
△1901년 2월 27일 문교장관 Nikolay Bogolepov
△1902년 4월 2일 내무장관 Dmitry Sipyagin
△1904년 7월 15일 내무장관 Vyacheslav Plehve은 세번 모면 후 오크라나 프락치 예조프가 주도
△1905년 2월 17일 황제 작은 아버지이자 모스크바 총독 Sergei Alexandrovich
△1905년 11월부터 1906년 6월까지 주로 경찰관인 내무부공무원만 288명 사망, 383명 부상
△1906년 10월 말까지 지사로부터 일선 경찰관에 이르는 정부공무원 3611명 살상.
△1911년 9월 14일 내무장관 겸 총리 Pyotr Stolypin은 10회 미수 후 오크라나 프락치가 실행

이같은 상층부 암살은 정부수뇌부 기능 마비를, 일선 공무원 암살은 현장집행력을 방해해 이를 통해 국가전복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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