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다시 생각함
필자는 젊은 시절 권투 프로모터 생활을 하면서 일본을 자주 왕래했다. 일본을 갈 때마다 일본 사람들의 생활태도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생각해 보면 정말 싫고 미운 나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갈 때마다 한 가지 더 고약한 감정, 무서움이 추가되었다. 우리가 영원히 원수가 될 필요는 없지만, 이길 수 없는 나라가 원수로 남아있는 것은 국가적 재앙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보자.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 하나도 광장에서 볼 수 없다. 담배꽁초 한 개비도 길거리에서 구경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작은 비닐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씹고 난 껌을 싸서 버리는 휴지도 같이 들어있다.
웬만해서는 길거리에서나 시내 도심에서, 고속도로에서 일부러 수입 외제 차량을 찾으려 했지만,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지금 한국에서는 차 10대 중에 외제, 수입차가 절반 가까이 되는 것에 비하면 자유무역 협정이 무색하도록 철저한 배타주의의 일본 민족성이 소름 끼칠 정도다.
등굣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골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모습도 보았다. 고학년 학생들이 횡단보도 양쪽에서 깃발을 들어 차를 세운다. 길 양쪽에서 저학년 학생들이 줄지어 서있는 차량을 향해 동시에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고사리 손을 흔들며 차례를 지켜 질서 정연하게 길을 건넌다.
아이들이 길을 다 건넌 것을 확인한 후 차량의 어른들도 웃으며 경적으로 답례한다. 인간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아름다운 시민정신 아닌가? 가정에서 가르치는 일본 어린이들의 사회교육엔 이런 것도 있다.
이른바 ‘오아시스 정신’을 길러 주는 것이다.
오 : 오하요우 고자이마쓰!(안녕하세요라는 뜻의 아침인사)
아 : 아리가또우 고자이마쓰!(감사합니다)
시 : 시쯔레이 시마쓰!(실례합니다)
스 : 스미마셍!(죄송합니다)
‘오아시스’라는 덕목을 이들은 어려서부터 입에 달고 산다. 일본인들은 길을 가다가도 자주 뒤를 돌아본다. 혹시 자신이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하는 배려하는 마음에서다.
<안자춘추>(晏子春秋)에 이런 말이 나온다. “강남의 귤을 강북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얘기다.
일본과 한국 중에 어디가 강남인 줄은 잘 몰라도 한국에는 왜 아직 탱자만 열리는지 알 수가 없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잠들어 있는 ‘닛코’(日光)를 다녀 온 적이 있다. 그 일본의 성지에서 값 비싼 선물을 샀었다.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산을 내려오다가 구두끈이 풀려 다시 맨 다음 깜빡하고 그냥 내려오고 말았다. 산 아래 버스터미널에서 번쩍 정신이 들어 허겁지겁 선물을 찾으러 산을 다시 올라갔다.
이미 시간이 상당히 지나 선물은 벌써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선물은 고스란히 그 자리에서 나를 반겼다.
우리 이렇게 이길 수 없는 원수를 영원히 옆에 두고, 어찌 발 뻗고 편히 잠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두려운 생각이 엄습해왔다.
우리가 사회적 예절 하나 제대로 못 지키는 한 일본은 우리를 만만하게 여기고, 반성은커녕 점점 기고만장하여 못된 침략근성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기본을 지키고 힘을 길러야 극일(克日)은 물론 승일(勝日)의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