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전문기자가 본 노숙인 보도의 ‘오늘과 내일’

[아시아엔=조동찬 sbs 의학전문기자] 필자는 기자가 되기 전에 의사였다. 아이티 지진이 났을 때 세브란스의료팀과 함께 봉사 갔을 때, 그 현장에서 ‘기자’란 발로 찾아가는 직업임을 배웠다.

2008년 sbs 기자가 돼, 의학전문기자로 활동하면서 열심히 활동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숙인에 대해서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못했다는 점에 많이 반성했다. 그러면서 언론은 그동안 노숙인, 홈리스를 어떻게 바라봤고, 어떤 대안을 가지고 보도해 왔는지 살펴보게 됐다.

노숙인 첫 실태조사는 2017년 복지부에서 했다. 전국 노숙인은 1만1천여명, 거리를 떠도는 사람이 1500여명, 쪽방 거주민 6100여명으로 나와 있다. 이들이 노숙인이 된 계기는 질병과 장애, 이혼, 가족 해체, 실직 등 경제적인 문제가 원인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물론 질병과 장애도 경제 문제를 동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같은 범주에서 보면 이 또한 경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들 중에는 고혈압과 당뇨가 36%인 것을 비롯해 치과질환과 정신질환도 있다. 우울증도 50%가 넘고, 음주자도 10명 중 4명에 이른다.

필자는 처음 이 결과를 보고 ‘이것 밖에 안되나?’라고 생각했다. 아마 최소한의 통계자료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코로나19가 노숙인을 더 증가시킨 듯하다. 지난 5월 보도자료에 ‘서울 노숙인 감소세 뒤집었나…2020년 6년 만에 반등’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2013~2020년간의 노숙인 통계를 보면 2013년부터 꾸준히 줄어들다 코로나 유행이 시작된 2020년부터 다시 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언론은 어떻게 보도했을까 살펴봤다. 네이버에 ‘노숙인’ ‘노숙자’를 검색했고, 구글에서도 마찬가지로 검색했다, 네이버에 노숙인 관련 정책기사들은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만, 실제로 보는 이는 드물다. 그 다음에 관련도순, 최신순으로 검색해 보면 ‘나를 해칠 것 같아서…일면식 없는 남성에 흉기 휘두른 노숙인’ 등의 범죄사건이 발생할 때 기사도 많이 나왔다.

또한 ‘감염 노숙인 106명 찾아낸 경찰관’과 같은 미담기사가 주를 이뤘다. 즉, 노숙인이 등장하는 기사는 범죄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나, 미담사례 대상이 되는 기사에서 많은 클릭 수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일면식 없는 남성에 흉기 휘두른 노숙인’과 같은 기사는 일반인들에게 나도 당할 수 있다는 공포심을 주면서 클릭 수를 유도하고, 대책이 필요하다는 등의 목소리를 내게 한다.

또한 ‘감염 노숙인 106명 찾아낸 경찰관’과 같은 기사는 허름한 노숙인의 모습과 건장한 경찰관의 대비가 두드러지게 보도함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가령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에 연예인이 찾아가서 아이들에게 분유를 먹이는 모습 등과 비슷하다.

낮 기온 35도 안팎으로 무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서울역 광장에서 한 노숙인이 그늘에서 휴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필자는 그러나 노숙인을 위한 보도가 이런 것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이런 류의 기사와 관련해 우리 언론인들은 ‘선정적이고 인기 끌기 위한 보도’라는 비판에 늘 시달린다.

노숙인 보도를 보면 노숙인이 우리나라 정신질환자와 비슷한 형태로 언론에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질환자가 일면식 없는 일반인에게 가해를 입히는 사건은 기사화가 많이 된다. 가장 유명한 기사가 ‘안인득 사건’이다. 사람들이 이 기사를 접하고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정신질환자의 흉기 난동으로 한 의사가 사망한 사건을 보도한 적이 있다. 당시 피의자는 경찰조사에서 “노숙인 쉼터가 춥고 음식이 좋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필자의 그 기사에서 ‘노숙인’이 등장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노숙인 비전문가로 기자 입장에서 어떻게 노숙인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정신질환자와 노숙인이 공통선상에서 등장하는 것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노숙인에 대한 자립지원 모델안이 있다. “노숙인이 스스로 생활할 수 있도록 나머지 부분을 지원해 주자.” 지극히 당연하고 원칙적인 얘기로 전혀 이의를 달 이유가 없다. 그런데 “노숙인을 위한 커뮤니티케어는 없다”는 전문가의 기고문이 눈에 띄었다.

노숙인을 위한 커뮤니티 케어는 왜 없을까? 2019년 지자체 공모 과정에서 노숙인 커뮤니티케어 선도사업을 신청한 지자체가 한 곳도 없었다고 한다. 장애인 시설은 5곳, 정신질환자 시설엔 2곳의 지자체가 각각 신청했지만, 노숙인 시설엔 어느 지자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노숙인 시설을 유치해봐야 이득 될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왜 그럴까? 노숙인은 정치적 영향이 거의 없다. 표가 안된다는 것이다. 장애인은 협회도 많고, 장애인 국회의원도 있다. 또 정신질환자는 가족이나 케어하는 사람들의 협회가 있다. 크기에 관계없이 일정한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노숙인은 그런 단체가 없다. 지자체가 굳이 나서고 싶지 않은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노숙인이 받는 처우는 장애인과 정신질환자의 아래, 가장 바닥이 아닌가 싶다.

필자는 지난 10년 이상 공공의료 확충을 주창해, 이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썼다. 한국의 공공의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더 늘려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코로나 팬데믹이 필자 생각을 바꿔놓았다. 우리나라가 모델로 삼았던 영국은 코로나19로 완전히 무너졌고, 한 최고의학전문가는 “영국 공공의료 시스템은 ‘스캔들’”이라고 했다. 코로나19에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기초적인 의료의 질도 우리보다 훨씬 뒤지고 있었다.

필자는 이제 전반적이 공공의료 확충은 반대하는 입장에 있다. 다만 현재 공공의료가 민간이 하지 않는 장애인, 정신질환, 노숙인 부문에 뛰어드는 것은 적극 찬성한다.

공공의료가 현재 잘 갖춰진 민간의료와 경쟁하는 대신 사각지대로 눈을 돌려 발 벗고 나선다면, 국민들은 거기에 들어가는 세금은 아까워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전제는 이들 시설도 민간 수준의 질은 갖춰야 한다는 점이다. 가난한 사람이 찾는 병원이 부자가 이용하는 병원보다 떨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논쟁적이 주제이긴 하다.

최근 감명 깊게 본 영화가 있다. <로스트 인 더스트>(원제 Hell or High Water)란 영화다. 은행털이 형제와 보안관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왜 은행을 털었을까? 이들은 텍사스 농장 경영주의 후손이다. 경기침체로 농장 운영이 힘들어지자, 은행으로부터 싸고 편리한 돈을 빌렸다. 하지만 대가는 값싸지 않았다. 농장주는 빚에 허덕이고 농장을 하나둘 은행에게 빼앗기고 있었다. 마침내 형제는 은행을 털어서 농장을 지키려 했다. 여기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가난은 전염된다. 자식과 손자에게” 가난의 전염을 끊기 위해 가난을 전가시켰던 ‘주범’인 은행을 털었다는 대사인 것이다.

사회의 근본 원인은 그대로 둔 채 다른 방법으로 돕는 것은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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