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일] 네팔 왕자의 왕실 학살 사건

2003년 중국 싼샤댐 저수 시작

2003년 6월1일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인 중국 후베이(湖北)성 싼샤(三峽)댐이 10년 동안의 공사 끝에 처음 물채우기에 들어갔다. 싼샤댐은 이날 새벽 0시를 기해 22개 수문 가운데 19개를 닫으면서 담수를 시작, 세계 수력 발전사에 신기원을 세우게 됐다.

다음 날 수위는 전날보다 8m 상승한 해발 106m에 이르렀다. 싼샤댐은 일일 수면 상승폭 5m 이하를 유지하며 서서히 물을 채워나가 6월15일 최고 수위 135m에 이르자 저수 작업을 끝냈다. 저수가 끝난 다음날인 16일부터는 선박 통행이 시작되고 8월엔 발전기가 가동됨으로써 싼샤댐은 저수·통항(通航)·발전의 3대 기능을 모두 수행하게 됐다. 2009년 완공 땐 최고 수위가 175m에 이르렀다.

댐 건설로 후베이성 산더우핑(山斗坪)에서 충칭(重慶)직할시에 이르는 662㎞ 길이의 창강 유역이 물에 잠겨 저수량 390억 톤에 이르는 거대한 인공호수가 탄생했다. 댐 길이와 높이는 각각 2.3km와 185m, 연간 수력발전량은 846억㎾에 이르게 된다.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초(楚)나라 때의 시인 굴원(屈原)의 유적지를 비롯한 댐 인근의 수많은 문화재가 유실되고 최대 100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대량 이주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마찰이 있었다.

물 채우기가 시작된 1일 오전 이미 한(漢)대 건축물과 협곡 절벽의 잔교(棧橋)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또 유비가 숨진 백제성과 장비 사당인 장비묘, 절벽 누각 석보채, 굴원 기념관도 곧 수몰됐다. 쓰촨(四川)성 펑제(奉節)현에 있는 백제성은 유비가 오(吳)의 군대에 쫓겨 피신했다 임종을 맞은 곳이다. 윈양(雲陽)현의 석보채는 이백(이白)·두보(杜甫)·백거이(白居易)·소동파(蘇東坡) 등 수많은 시인들이 머물며 명작을 남겼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싼샤댐 때문에 수몰되거나 이전되는 문물은 모두 1087곳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네팔 디펜드라 왕세자, 국왕 일가족 등 9명 살해

2001년 6월1일 네팔의 나라얀히티 왕궁에서 디펜드라 왕세자가 부모인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슈와리야 왕비를 비롯, 왕자·공주 등 국왕 일가 9명을 총으로 살해하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디펜드라 왕자가 취한 채 손님들과 함께 버릇 없이 행동하였고, 그 결과로 그의 아버지인 비렌드라 왕, 그의 아들은 만찬회장을 떠났다. 취한 디펜드라 왕자는 그의 동생 니라잔 왕자와 사촌 파라스 왕자에 의해 자신의 방으로 끌려갔다.

한 시간 후, 디펜드라는 한 자루의 MP5K과 한 자루의 M16 소총을 소지하여, 만찬회장에 되돌아왔다. 총을 단발로 천장을 쏜 후 그의 아버지 비렌드라 왕에게 겨누었고 몇 초 후, 디펜드라는 그의 고모를 쏘았고, 그 후 그를 막으려는 삼촌 디렌드라의 흉부를 근거리에서 쏘았다. 총격이 진행되는 동안, 니라잔 왕자의 슈르티 공주도 총에 맞고 파라스 왕자는 부상이 더 악화됐지만, 소파로 두 아이를 포함해 적어도 세 명의 왕족을 구했다.

당시 모임에는 왕족 30여명이 참석해 있었는데, 왕세자의 총에 9명이 죽고 20여명이 부상했다.

이 사건은 그동안 사귀어 오던 애인과의 결혼을 자신의 어머니가 반대하자 순간을 참지 못한 디펜드라 왕세자가 범행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범행동기에 대해서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디펜드라는 자살을 시도했다고 추정되는데, 디펜드라는 의식 불명인 채 즉위 했지만, 3일 후인 2001년 6월 4일에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갸넨드라가 다음 왕이 됐다.



1990년 한국 인터넷 바다로 첫 항해

1990년 6월1일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전자계산소 빌딩에서 KAIST 전길남 교수가 썬 스팍1이라는 워크스테이션을 켰다. 그러자 국내 HANA망(KAIST및 연구기관들끼리 연결 된 것)과 미국 하와이대학간에 설치된 56Kbps 인터넷 전용선을 따라 이메일과 데이터 파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국의 국내 전산네트워크가 인터넷을 통해 국제사회와 처음 소통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한국 내 데이터통신의 효시는 1982년 서울대 전자계산기학과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경북 구미)간 전용회선으로 연결한 SDN이었다. 이 네트워크는 인터넷 표준 규약인 TCP/IP를 이용하고 있었지만 미국과는 연결되지 않는 국내 온라인망이었다.

그리고 1994년 상용서비스가 시작된 한국의 인터넷은 1990년대 말 초고속인터넷이 확산되면서 급속하게 성장했다. 2002년에는 초고속 인터넷 1000만가구 시대를 열고, 2006년에는 세계 최초로 와이브로(WiBro), HSDPA(3.5세대 이동통신) 상용화 서비스를 해 인터넷 강국으로 도약했다.

1980년 CNN 방송 개국

1980년 6월1일 미국의 ‘유선TV황제’로 불리는 테드 터너는 미 애틀랜타 본사에서 세계최초로 24시간 뉴스만 방송하는 CNN(Cable News Network)의 첫 전파를 발사했다. CNN이 낸 첫 뉴스는 텍사스주 포트워크에서 발생한 흑인지도자 저격사건이었다. 이어 프로야구 뉴욕 양키스팀의 중심타자 레지 잭슨 구타사건을 생생한 화면으로 제공해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줬다.

3000만 달러의 예산과 200만가구를 대상으로 첫 전파를 발사할 당시만 해도 CNN은 황당무개한 벤처사업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방송기자들은 혼자서 카메라 촬영과 취재, 인터뷰 등을 현장에서 도맡아하는 근성을 보여줘 전 세계 언론인들에게 아직도 귀감이 되고 있다.

CNN의 슬로건은 “뉴스 속 지구촌 리더(The Worldwide Leader in News)”, “CNN = 정치(Politics)”, “TV 속의 최고 정치팀(The Best Political Team on Television)”, “CNN = 돈(Money)” 등이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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