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기 유럽 관료집단, ‘범죄엔 처벌’에 집착해 노동자·농민을 ‘위험시’

18~19세기 1차 산업혁명 시기 관료들 의식은 기술발달에 따른 사회변화를 이끌기엔 아직 부족했다. 

[아시아엔=치안발전포럼 이사장, 김중겸 전 인터폴 부총재] 유럽 농업개혁엔 소 대신 힘센 말이 끄는 기계식 쟁기와 농지를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농사짓는 3포제(三圃制)가 도입됐다.

농업생산 증가로 인구 즉 입이 늘고 이에 따라 식량수요가 많아졌다. 이에 토지 소유자와 토지귀족은 여유 돈 곧 자본을 손에 넣었다. 상업과 공업의 발전토대를 구축하는 형태로 나아갔다.

그 돈은 거의 공장으로 들어갔다. 기계 돌리고 운영하는 일은 새로 생긴 계급, 부르주아가 맡았다. 유산계급 출현한 것이다. 1760년대~1840년대의 영국 산업혁명의 결과다.

프로이센을 비롯한 유럽대륙도 뛰어들었다. 사회 지도층, 특히 관료가 선두에 섰다. 상법, 수표와 주식에 관한 법을 만들어 견인했다. 부르주아 공업사회가 성립됐다.

프랑스에서 1531년 칙령으로 규정한 ‘괭이와 쟁기로 땅 일구는 사람들=농민’에게는 농업증산에 따른 수확증가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지주와 공장주가 차지했다.

농민은 오히려 농토에서 쫓겨났다. 불평등 심화됐다. 노동자로 전락한 전직 농민들은 범죄성 띈 위험한 무리라 하여 감시대상자 됐다.

농촌은 빵 훔쳐 허기 채우는 ‘경미한’ 절도, 몸 녹으려고 불 지필 나뭇가지 줍는 ‘사소한’ 삼림도벌 등 민중의 위법행위가 대량으로 나타났다.

빈곤한 일상

도시로 농촌인구가 몰려들었다. 일자리 하나에 천 또는 만여명 대드는 실업사태 야기했다. 물가와 집세 앙등으로 인한 노숙, 소년소녀의 소매치기와 들치기와 매춘, 알코올 중독과 풍속사범이 만연했다. 일상생활의 실태다.

산업혁명기-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의 현상이었다. 유럽이 몸살 앓았다. 공급측면의 해결책은 엄두내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 외에는 대처할 이론과 정책 자체가 없었다.

행정관청, 관헌, 법원 앞세운 통제와 입건만 횡행한다. 정치는 “잡아넣겠다!”는 협박으로 일관한다. 준법? 굶어 죽기였다. 얼어 죽기였다. 반항한다. 사회적 곤궁을 공격적으로 해결한다. 범죄행동의 학습이 아니다. 범죄는 사회적 태도였다.

위험한 계급

마침 그 무협 독일 형법학자 포이어바흐가 법률로 형벌 예고하여 범행을 심리적으로 억제시키는 동시에 최소한의 형량을 주장했다. 하지만 현실에선 통용되지 않았다. 1806년 폐지해버린 고문도 여전히 횡행했다.

위정자와 관료집단은 범죄와 처벌이라는 명제에 집착했다. 먹을 게 남아도는 그들에게나 가능한 얘기였다. 농촌사회가 산업혁명 거쳐 공업사회가 된 구조적 변화를 깨닫지 못했다. 농업사회의 눈으로 봤다. 순진하고 순수했던 농민이 위험한 계급이 됐다고 봤다. 농민과 노동자 계급을 위험한 계급이라고 했다.

물론 계급에 대한 위험의식은 산업혁명으로 출현한 공장노동자로 인해 처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1830년 잉글랜드 남부 오랜 기간 이어진 빈곤에 절망한 농업노동자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장소가 농지냐 공장이냐는 차이만 있다. 공통점은 정치적 항의행동의 수단은 폭동뿐이라는 인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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