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질경이’ 류시화 “여름의 그토록 무덥고 긴 날에”
그것은 갑자기
뿌리를 내렸다
뽑아낼 새도 없이
슬픔은
질경이와도 같은 것
아무도 몰래
영토를 넓혀
다른 식물들의 감정들까지 건드린다
어떤 사람은 질경이가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서둘러 뽑아 버릴수록 좋다고
그냥 내버려
두면 머지않아
질경이가 인생의
정원을 망가뜨린다고
그러나 아무도 질경이를
거부할 수는 없으리라
여름이 가장 힘들고 외로웠을 때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슬픔만이
있었을 뿐
질경이는 내게
단호한 눈짓으로 말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타인으로부터
얼마만큼 거리를 주라고
얼마나 많은 날을 나는
내 안에서 방황했던가
8월의 해시계 아래서
나는 나 자신을 껴안고
질경이의 영토를
지나왔다
여름의 그토록
무덥고 긴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