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운의 문화예술] 점과 선으로 무한의 세계 표현한 이우환 화백
[아시아엔=최고운 미술 칼럼니스트, 피카프로젝트 선임 큐레이터] 이우환은 “적극적으로 견디는 것은 귀한 일이다. 운동선수나 선승(禪僧)과는 다른 방식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작법의 훈련을 쌓아간다. 더욱 큰 자유, 보다 선명한 세계를 원하기 때문이다. (중략) 한 점, 한 붓은 낭비 없이 에너지를 축척한 것, 연마되고 고양된 생명체인 것이다. 그것들은 호흡과 리듬을 조절하는 가운데 탄생하며 서로 관련해간다. 그렇기 때문에 화면은 단순한 기호의 집적이 아니며, 기운(氣韻)이 생동하는 생명체로 느껴지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명성을 쌓고 활동하던 이우환은 이론가이자 동시대의 작가들을 대변하는 비평가로서, 자신의 이론에 근거하여 논리적이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펼쳤다. 이우환(Lee Ufan, b. 1936~)은 어린 시절 동초 황견용으로부터 붓글씨와 그림을 익혔다. 고교시절엔 미술교사였던 장두건과 서세옥 곁에서 폴 세잔(Paul Cezanne)과 팔대산인(八大山人) 등에 관심을 가졌다. 1956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숙부의 권유로 일본에 남아 니혼대학교 철학과(1958~1961)를 다니게 된다.
대학 시절에 철학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예술론과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의 현상학, 노장사상과불교사상, 니시다 기타로(西田畿多郞)의 장소론 등을 공부했다.
예술가는 시대와 사회 환경의 영향을 받아 예술세계를 펼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성장배경은 매우 중요한데, 이우환이 활동할 당시의 일본은 반예술과 탈회화적 경향을 보였고, 특히 젊은 작가들이 일본의 전위적인 예술 활동을 전개했던 시기였다. 이우환의 예술론은 인공을 추구하지 않고 일상에서 흔한 여러 물질을 가공하지 않은 표현활동의 미술 경향인 ‘모노하(もの派)’의 태동과 더불어 형성되었다.
점의 배열을 통해 우주적 성격을 제시
이우환의 작품 중 최고 낙찰가를 기록한 ‘From Point’(1977)는 ‘점으로부터’의 연작으로, 붓에 한번 묻힌 물감이 다 없어질 때까지 찍어가고 또 다시 시작하는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캔버스를 가득 채우며 좌측에서 우측, 수평으로 찍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 배열된 점들은 유와 무가 반복되는 우주 생멸의 원리를 의미한 것이다. 점의 배열이 우주적 성격을 제시한다? 점에 대한 정의를 좀 더 명확히 해보자.
‘점’(点)은 선 또는 표현을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단위로, 붓으로 찍거나 물감을 떨어뜨린 작은 형태로 이루어진 가장 최소한의 면적으로 나타난다. 즉 ‘최소한의 행위에 대한 상징’으로 요약된다. 그렇기 때문에 캔버스나 종이 위의 한 점은 여백과 점의 위치, 크기의 변화, 공간의 변화와 결합에 따른 ‘다양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점과 여백은 대상과 배경, 물리적 관계성과 심리적 관계성, 내부와 외부, 정서적 관계 등을 내포한다고 볼 수있다.
더 나아가 점의 반복은 또 다른 반복을 낳는다는 시간상의 전개이자 지속적인 이어짐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작가의 행위와 그에 따른 시간상의 전개는 사물 그 자체를 활성화시키려는 의도와 연결된다. 하나의 점은 순간이지만, 점들이 모인 하나의 화폭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며, 이를 축약해 추상화한 시간의 응결 구조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캔버스는 고차원적인 장소이자 만남의 장(場)이 되고, 점의 반복성에 의해서 살아있는 구조체가 된다. 작품 속 이우환의 점은 계획된 연결이 아닌, 점과 점의 자연스럽고 반복적인 연결을 통해 무한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우환의 작품 중 두번째로 높은 경매가를 기록한 ‘From line, no. 760219’(1976)은 ‘선으로부터’의 연작이며, 붓을 떼지 않고 단 한 번의 붓놀림으로 선(線)의 배열을 보여준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작가만의 집중력과 규칙성에도 불구하고 선의 움직임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모든 선은 유일무이하며, ‘점으로부터’와 마찬가지로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통해 무한한 세계와의 관계를 표현한다.
이우환은 캔버스의 바탕을 흰색으로 일일이 고루 칠함으로써 중립성을 강조하고, 그 위에 고도의 집중력을 담아 점과 선을 표현한다. 작가에게 그림 그리는 행위는 매우 신중하며, 극도의 신체적 긴장과 온몸의 힘이 결합되어 한다. 이를 통해 탄생된 작품엔 회화의 가능성과 근본적인 동인(動因)이 녹아 있다. 이우환은 나름의 규칙적인 호흡을 매우 강조해 호흡과 그리는 과정을 일치시키려 한다. 이를 통해 작품과 작품을 만드는 이의 육체적인 대면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서양 속에서 보이는 동양적 측면
이우환은 서양 철학을 받아들이되 동양 사상과 기법을 결합시켜 독자적인 이론과 작품을 이뤄냈다. 그 예로 작품에서 파란색 무기안료와 아교를 섞어 사용하는 것은 동양 회화의 전통을 따르며, 캔버스를 선택해 근대 서양미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을 따르기도 한다. 이우환의 점과 선, 터치는 연결된 선상에서 정렬되기도 하고, 엇갈리면서도 순응적 직선과 유동적 곡선, 파행적 선들, 극단적인 불연속의 선들로 변모하면서 서술 구조 또는 비선형적 구조로 확장된다.
이우환은 동서양의 소재를 혼용하되 기법은 서양의 액션페인팅 대신 동양의 미학과 이데올로기와 걸맞은 점과 선의 반복을 택했다.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에는 진동과 파가 존재한다. 이우환의 작품은 채워지지 않은 공간의 진동을 일으켜 점과 선으로 표현하고, 그 존재를 선명하게 드러내 세계와 세계의 이어짐을 제시한다.
이우환은 이론과 작업을 병행하는 작가다. 그는 존재와 비존재(여백) 사이, 공간과 공간의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서로를 인식하는 본질적인 자아를 탐구하는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했다. 즉, 서구 근대미술의 방법론적 수용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시도함으로써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으로 보여준 것이다.
현대미술계에 한국 대표 작가로 여겨지는 이우환의 작품세계는 해외 미술계에서도 자주 논의된다.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국제적 미술 흐름 속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의 전개와 추이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내며 고유한 예술 세계를 전개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은 그 시대가 처한 상황을 반영한 역사적(시대적) 산물이며, 그 자체로 필연성과 가치를 지닌다. 국제적 미술 흐름 속에서 한국 미술이 하나의 사조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한국 근현대미술의 선구적 정신과 정체성을 미학적 담론으로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서두에 시작한 바와 같이 작가의 말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일필 일필은 모두 호흡과 리듬을 지닌, 살아있는 것의 조응(照應)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필력을 살리는 훈련을 쌓는 행위의 반복에 의해 얻어지게 된다. 이러한 제작의 영위는 회화를 싱싱한 우주의 퍼짐으로 이끌어서 자기를 그 가운데 소생시키려는 수업인 것이다.”
임선미 RA(Research Assistant) 연구 보조/자료 리서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