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인권···헌법 고민에 머리 맞댄 아시아
오랜 내전 끝에 지난 2008년 공화정을 이룩해 연방공화제를 헌법에 명시하려 하지만 지역정치와 집권 마오주의자에 대한 이념적 논란이 뜨거운 네팔은 모든 법령의 기초인 헌법을 잘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국교(불교)와 ‘통치하는 국왕’의 권한이 헌법에 명시돼 왕권의 향배(강화냐 약화냐)를 둘러싼 갈등이 치열한 태국 역시 개헌을 계기로 헌법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민주주의 발전 격차가 크고 전반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포함한 법치의 역사가 짧은 아시아 각국들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적 기본권을 명시한 헌법을 지구촌의 시각에서 재조명하면서 법치 질서를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최근 부쩍 활발해지고 있다.
‘아시아헌법재판소연합(아재연합)’ 초대 의장국으로서 창립총회를 서울에서 유치한 한국의 이강국 헌법재판소 소장은 22일 오후 4시반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민주주의 역사가 짧고 법치의 원칙이 뿌리내리지 못한 아시아 지역에서 헌법전문가들의 교류·협력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면서 이 같이 밝혔다.
이 소장은 “한국과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몽골·필리핀·러시아·타지키스탄·태국·터키·우즈베키스탄 등 10개국 헌법재판기관이 모인 아재연합은 상설협의체로서, 앞으로 아시아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확고하게 뿌리내리는데 앞장설 것”이라고 덧붙였다.
잉락 친나왓 총리가 이끄는 태국 정부는 지난해 8월 출범한 이래 군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잉락 친나왓 총리가 ‘민주주의 확대’ 등을 명분으로 내세워 헌법 개정을 추진하자 군부가 발끈하고 나선 상황이다. 태국 현지 여론은 잉락 총리의 개헌 시도가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의 정치적 복귀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태국 군부는 개헌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통치하는 국왕’ 체제를 뒤흔들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태국은 2007년 입헌군주제 하에 헌법재판소를 구성했다. 이번 아재연합 창립대회에는 헌재소장을 비롯한 9명의 헌법재판관 전원이 참석해 뜨거운 열정을 과시했다.
대회 3일째인 22일 ‘사회·경제·문화 측면에서 국제교류의 증대가 헌법재판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2번째 토론 세션의 좌장을 맡은 찰럼폰 아케 우루(Chalermpon Ake Uru) 태국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개헌을 둘러싼 복잡한 국내 사정을 감안한 민감한 질문이 예상되자 아시아엔과의 인터뷰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밖에 왕정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 제헌의회가 구성됐지만 정당간 이견으로 의회 회기가 거듭 연기되고 있는 네팔에서도 다모다르 프라사드 샤르마(Damodar Prasad Sharma) 네팔 대법원?등이 이번 창립대회에 참가해 각국의 헌법관련 의견을 귀담아 들었다.
이브게니 탄쉐프(Evgeni Tanchev) 불가리아 헌법재판소장은 “유럽연합(EU) 국제사법재판소는 물론 일반 법원에서도 국제법상 분쟁을 다루는 등 현대 사법제도의 추세는 국제법 우선주의”라면서 “국제 사회에서 테러리즘 방지 등 국경을 넘어서는 이슈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만큼 인권을 기본으로 삼는 헌법재판제도의 교류는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탄쉐프 소장은 또 “각국 헌재 간 교류는 양국간, 지역간, 대륙간 협력이 모두 가능하고 각자의 의미도 크다”면서 “특별히 아시아지역에서 헌재연합의 중요성은 크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불어권 헌재연합 의장과 아프리카헌재연합 회장직을 함께 맡고 있는 로버트 S.M 도쏘(Robert S.M. Dossou) 베냉(Benin) 헌법재판소장은 “인권의 가치는 국경을 넘나들며 아프리카 전역에 공통된 문제였다”고 했다. 이어 “2010년 알제리아가 주도해 아프리카헌재연합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면서 “아프리카 법치주의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또 “타국의 헌법재판 결정 사례 등 제도와 판례 등 다른 국가의 경험은 베냉과 아프리카에 큰 참고가 됐다”고 덧붙였다.
한국 헌법재판소의 육정수 공보관은 “이번 창립총회에 즈음해 파키스탄이 아재연합에 대한 가입이 승인됐다”면서 “오늘 채택된 ‘서울 선언문’을 통해 우리는 아시아 지역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발전, 인권 시장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아시아 지역 국가들이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많은 차이가 있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서 “합리적인 법치제도를 공유하고 발전시키는 데 아시아 기자들이 먼저 각국에서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종섭 서울대 법대 학장(헌법학)은 한 신문 기고문에서 “오늘날 입헌주의와 민주주의는 글로벌한 문제이기에 헌법재판 역시 글로벌한 수준에서 논의되고 있다”면서 “한 나라가 고유성을 내세워 자기 입장을 고집하는 것이 통용될 수 없으며, 각 나라의 경험이 공개되고 공유되면서 발전하고 있다”고 이번 회의의 의의를 설명했다.
아시아헌재연합은 의장국인 한국을 비롯해 태국·몽골·필리핀·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우즈베키스탄·러시아·타지키스탄·터키 등 10개국이 가입한 상설 지역협의체다. 유럽헌법재판소회의나 중남미헌법재판기관회의처럼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삶의 가치에 맞는 헌법재판 제도를 만들어 가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아재연합’ 창립총회에는 인도·카자흐스탄·싱가포르 등 10개국의 옵서버와 부탄·중국·일본·미얀마 등 10개국의 게스트가 참가, 국가 간 헌법재판제도 공유에 각국의 관심이 크게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2년에 한 번 열기로 한 ‘아재연합’ 차기 총회는 오는 2014년 터키에서 개최된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