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녀의 외침 “종교계가 소름끼치도록 조용하다”

명동성당
한 수녀가 쓴 것으로 알려진 글이 최근 천주교 신부와 신도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서울의 한 성당 주임신부는 “모르는 수녀님이지만 글은 현실을 잘 파악하고 비판한 글”이라고 합니다. 60대의 신자는 “천주교 교역자들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 이상인 사람도 종종 본다”고 말합니다. <아시아엔>은 글 전문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편집자>

나는 더 이상은 정의를 외면한 사랑을 신뢰할 수 없다. 양들이 사지(死地)로 내몰리고 있는 처절한 상황 앞에서도 눈·귀·입을 닫은 목자들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직장상사에게 굴욕을 당해 본 적도 없고, 자기 방 청소며, 자신의 옷 빨래며, 자신이 먹을 밥 한번 끓여 먹으려고 물에 손 한번 담가본 적이라곤 없는 가톨릭의 추기경, 주교, 사제와 수도자들의 고결하고 영성적인 말씀들이 가슴에 와닿을 리가 없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보호를 외면하고, 제도교회의 사리사욕에만 몰두하는 목자 아닌 관리자들이 득실거린다. 고급승용차, 고급음식, 골프, 성지순례(해외여행)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부자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 자신이 부자이며 특권층이 되어버린 그토록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의 모습이 아름다울 리가 없다.

주교문장에 쓰인 멋스런 모토와 그들의 화려한 복장, 가슴 위의 빛나는 십자가를 수난과 처참한 죽음의 예수님의 십자가와 도무지 연결시킬 재간이 없다. 나날이 늘어나는 뱃살 걱정이며 지나치게 기름진 그들의 미소와 생존의 싸움에 지쳐있는 사람들과는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또한 가난을 서원한 수도자들 역시 그리 가난하지가 않다. 수도원에서는 아무도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다. 안정된 공간에서 해주는 밥을 얻어 먹으면서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대접을 받고 산다.

어딜 가도 수녀님, 수녀님 하면서 콩나물 값이라도 깎아주려는 고마운 분들 속에서 고마운 줄 모르고 덥석 덥석 받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간다. 말만 복음을 쏟아 놓았지 몸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며, 아기를 낳아보고, 남편자식 때문에 속 썩고, 시댁친정 식구들에게 시달리며 인내와 희생을 해본 적이라곤 없는 탓에 철딱서니 없는 과년한 유아들이 없지 않다.

수도복 입었다고 행세할 무엇이 있었던가? 본인이 원해서 하는 독신생활에 자랑할 무엇이 있었던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겸손하게 봉사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지 않는다면 수도복과 수도생활, 독신생활조차 그 의미가 희석된다.

교구, 본당, 수도회의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세상 일에 눈을 돌릴 수 없다고 변명하고 책임 회피할 수가 있는 것일까? 인간의 생명이 함부로 훼손되고, 사회적 약자들이 실의와 도탄에 빠진 이 나라 정치사회의 불의를 향해 단호하게 저항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수도자들이라도 결집하여, 그래서는 안된다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수도자들이라도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종교계가 소름끼치도록 조용하다. 이것은 무얼 뜻하는 걸까? 나 역시 작은 수녀에 불과하고 비겁하며 합리화하고 회피하고도 싶다. 내가 비판한 사람들 못지 않게 비판받을 행동을 하고 있다는 뼈아픈 자의식으로 인해 차라리 그 모든 것에서 물러나서 침묵을 택하고도 싶다.

그러나,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는 아모스 예언자의 외침이 내 심장에서 불꽃처럼 뜨겁게 일어서고 있다.

1987년 6월 명동성당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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