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늙어 간다는 것, 단풍처럼!
곱게 늙어 가는 분을 만나면 세상이 참 고와 보인다. 늙음 속에 낡음이 있지 않고 도리어 새로움이 있다. 이렇게 곱게 늙어가는 이들은 늙지만 낡지는 않다. ‘늙음과 낡음’은 글자로는 불과 한 획(劃)의 차이밖에 없다. 하지만 그 품은 뜻은 서로 정반대의 길을 달릴 수 있다.
‘늙음과 낡음’이 함께 만나면 허무(虛無)와 절망(絶望) 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늙음이 곧 낡음이라면 삶은 곧 ‘죽어감’일 뿐이다. 늙어도 낡지 않는다면 삶은 나날이 새롭다. 몸은 늙어도 마음과 인격(人格)은 더욱 새로워진다. 더 원숙(圓熟)한 삶이 펼쳐지고 진리에 대한 더 농익은 깨우침이 다가온다.
늙은 나이에도 젊은 마음이 있다. 늙어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겉은 늙어 가도 속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아름답게 늙는 것이다. 겉이 늙어 갈수록 속도 더욱 낡아지는 것이 추(醜)하게 늙는 것이다. 늙음과 낡음은 삶의 미추(美醜)를 갈라놓는다.
곱게 늙어 간다는 것!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이다. 멋모르고 날뛰는 청년의 추함보다는 고운 자태로 거듭 태어나는 노년의 삶이 더욱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행여 늙는 것이 두렵고 서러우신가? 그것은 마음이 늙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바람에 지는 줄 모르는 낙엽이 땅에 떨어지기까지는 순간이지만, 그럼에도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것은 분명히 절규가 아니라 춤추는 모습이다. 낙엽이 지기 전의 마지막 모습은 아름다운 단풍이었다. 말년의 인생 모습도 단풍처럼 화사(華奢)하고 봄꽃보다 고운 잘 물든 단풍처럼 장엄(莊嚴)하다. 마치 해질녘의 저녁노을처럼.
인간은 누구나 ‘삶의 유혹’과 ‘죽음의 공포’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고자 고민한다. 이게 인생의 참 공부다.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 늙음의 내리막길이 아닐까? 인생도 오르는 길은 힘들다. 내려가는 길은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삶의 길을 멋지게 내려가는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걸 우리는 수행(修行)이라 한다.
첫째, 허공처럼 만드는 것이다. 비움의 실천은 ‘버림’으로써 여백(餘白)을 만드는 일이다. 분별(分別)하지 않는 것이다. 예쁘고 밉고는 참마음이 아니다. 좋고 나쁘고도 참마음이 아니다. 허공처럼 텅 빈 마음 그것이 참마음이다. 없고 없고 또 없는 그 마음 그대로 갖는 것이 허공처럼 텅 빈 마음이다.
둘째,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오랜 세월의 경륜이 있어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노인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신중함이 있다. 수행에 힘쓴 사람은 쓰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부도옹(不倒翁)이라고 한다.
셋째, 늙는다는 것은 점잖다는 말이다. 노인이 되면 언행이 무겁다. 그래서 어둡지 않다. 품격이 고상하되 야하지 않다. 그래서 ‘점잖다’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젊은이처럼 감성에 쉬이 휘둘리거나 분위기에 가볍게 흔들리지 않는다. 점잖음은 중후한 인생의 완결이자 노인이 보여줄 수 있는 장엄한 아름다움이다.
넷째, 사리연구의 달인이 되는 것이다. 늙으면 생각이 깊고 신중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삶의 경험과 평소 사리연구를 연마한 결과다. 노인이 되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다 보니 했던 말을 또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일념통천(一念通天), 곧 지혜의 샘물이다.
다섯째, 10분의 6의 법칙. 세상만사가 다 뜻대로 만족하기를 구하면 안 된다. 그런 사람은 모래 위에 집 짓고 천만 년의 영화를 누리려는 사람같다. 지혜 있는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십분의 육만 뜻에 맞으면 그에 만족하고 감사를 느낀다. 또한 십분이 다 뜻에 맞을지라도 그 만족한 일을 혼자 차지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같이 나누어 즐긴다. 그리하면 재앙을 당하지 않을 뿐더러 복이 항상 무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