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속으로] 창경원 연못과 캐나다 루이스호수

캐나다 루이스호수. 멀리 산 위엔 눈이 덮여있고, 물 위에선 카누 젓는 여행객들이 보인다.

[아시아엔=김영옥 재미 간호사] 캐나다의 루이스호수는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여행을 다닌 곳 중에서 내가 제일 잊지 못하고 좋아하는 곳이다. 20여년 전 처음 그 호수 앞에 섰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꼼짝할 수 없었다. 충격이었다.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좋겠다,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 하는 마음이었다.

5월의 마지막 주말이었고, 꽤 늦은 오후였다. 시선이 가는 저 먼 곳, 눈을 껴안은 높은 산은 그 몸을 반쯤 어스름 푸른 빛이 도는 호수 위에 눕히고 있었다. 앞의 낮은 산들이 양옆에 늘어서 큰 산을 호위하며 물 위에 그림을 그렸다. 호수 위 음영에 따라 무채색 보석이 제각각 다른 채도로 빛을 내고 있었다.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면 눈 덮인 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같이 길이 보였다.

호수 위로 보이는 듯, 사라지는 듯하며 가는 눈발이 조용히 날렸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는 그곳에서 나도 잠시 그 일부가 되었다. 적막한 스산함, 매혹적인 싸늘함, 호수가 주는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하여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나도 모르게 여러 사람에게 그때의 감동을 전해서인지 주위의 많은 사람이 그 이야기를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그곳을 찾게 됐다. 오랜만이지만 여전히 기억이 생생하여 몹시 설렜다. 호숫가를 오래 지켜보고 싶어서 숙소도 아주 가까운 곳으로 잡았다. 호숫가 근처로 나가니 우선 보이는 것이 커다란 주차장,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었다.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찾은 그곳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있었다.

엉키는 발걸음이 수선스러웠다. 서로 다른 언어들이 공중에서 부딪히며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빨간 카누들이 물 위를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쉬지 못하는 호수는 피곤해 보였다. 높은 산, 깊은 계곡에서 내리는 기운을 받아 안았다가 다시 들어 올리는 힘이 보이지 않았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다음 날 아침, 다시 호수를 보러 나갔다. 새벽부터 몰려든 사람과 관광버스가 계속해서 쏟아낸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순간 호수가 지난밤 잠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호수 가운데로 나가면 숨을 쉴 것 같았다. 카누가 놓여 있는 쪽으로 갔다. 카누는 한 번도 타보지 않았지만 걱정되지도 않았다. 보트 타는 걸 도와주는 청년은 우리를 보더니 불안한 모양이다. “노 젓는 법을 가르쳐 줄까?” 한다. 노 젓는 배를 타는 것은 내 일생에 두 번째다.

창경원 연못에서 노 젓는 배를 타던 그 시절. 1970년대 초반까지 이런 풍경이 드물지 않았다. 지금도 연못은 그대로다. 

첫번째는 창경원 연못에서였다. 남편과 결혼하기 전이었다. 데이트하다가 갑자기 그가 배를 타자고 했다. 나는 내심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마주 보고 앉은 작은 목선에서 젊은 시절의 남편은 힘차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의 노 젓는 모습에, 이 남자와 결혼해도 좋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나는 선미에 앉아 앞만 보고 나간다. 예전 같지 않고 두렵다. 뒤에 앉은 남편이 방향을 조정한다는데, 뒤돌아볼 수가 없다. 조금만 고개를 틀어도 내 무게 때문에 배가 흔들린다. 불안하여 노를 오른쪽 왼쪽으로 바꿔가며 힘을 써보는데 배는 갈지자로 간다.

어느새 호수 안으로 꽤 많이 들어왔다. 물결은 잠잠하고 설산은 눈앞에 있다. 노를 놓고 가만히 있으니 물결에 배가 가볍게 흔들린다. 머리가 맑아진다. 나는 지금 무슨 생각으로 무얼 하고 있나, 번뜩 머리를 치는 게 있었다. 결국에는 나 역시 호수를 괴롭히는 무리에 끼어들었음을 깨닫는다. 물 위에 떠다니며 휘젓기까지 했다.

겨우 보트 선창(Dock)에 도착하여 내리니 다리도 후들거리고, 팔도 아프다. 호숫가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복작거린다. 남편이 앞서 걷고 있다. 내려앉은 어깨가 구부정하고 뒷머리의 머리카락도 엉성하다. 자신있게 노를 젓던 남자는 어디로 갔나? 창경궁 연못의 목선 위에 앉아서 젊은 남자를 바라보던 나도 이제는 없다. 내가 아는 그 호수는 마음속에만 있다.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니 호숫가 풍경이 변하는 것도 어쩔 수 없나 보다.

기억하는 것을 그대로 기억하기, 가슴이 알고 있는 그대로 간직하기, 이것이 내가 변함없이 잊지 말아야 할 일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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