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4일]예금자보호 안되는 ‘행복’을 저축하는 한국인들

2010년 어린이 행복지수, 한국이 OECD 회원국 중 꼴찌

2011년 5월4일 한국의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와 한국방정환재단은 “한국 어린이와 청소년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6개 회원국 가운데 꼴찌”라고 발표했다.

이들이 발표한 ‘2011 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에 따르면, 한국 어린이와 청소년은 “삶에 만족하는가”란 질문에 53.9%만 ‘그렇다’고 응답했다. 삶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네덜란드(94.2%)보다 무려 40.3%포인트 낮고, OECD 평균(84.8%)에도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한 해 전인 2009년 수치(55.5%)보다도 1.6%포인트 더 낮아졌다.

3년 연속 OECD 꼴찌였고, 한국보다 순위가 한 단계 위인 헝가리와의 점수 차이가 무려 20점 넘게 났다. 선진국 클럽인 OECD의 가입 조건에 ‘행복’이 빠진 것도 의아하지만, 만약 ‘행복지수’가 있었다면 한국은 결코 가입될 수 없었던 셈이다.

이번 조사는 전국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학생 543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것이다.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가 2006년 당시 OECD 25개 국가에서 실시한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연구와 비교 분석한 결과이다.

한국 초등학교 4학년 아이에게 ‘행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54.4%가 ‘가족’을 택했다. 건강과 자유, 친구, 성적, 돈이 그 다음이었다.

한국의 전국교직원노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어린이 스트레스의 80% 이상이 학원 다니기와 학업 성적에서 비롯됐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돈을 꼽았다. 그런데 돈을 꼽은 아이일수록 행복지수는 떨어졌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면서도 끝내 행복을 느껴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한국인들이 점점 늘고 있다. 한국의 발전모델을 배우려는 나라들은 주의해야 할 것 같다. 선진국은 행복과 무관한 게 아닐 테니까.

1999년 가장 오래된 문자 새겨진 도기조각 파키스탄서 발굴

1999년 5월4일 영국 BBC방송은 인류가 기록한 최고의 문자가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도기 조각이 파키스탄의 고대문명 유적지에서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표면에 용기안의 내용물을 표시한 내용과 주술적 의미를 담은 기호가 새겨진 이 도기조각들은 4500년 전 번성했던 인더스 문명의 하라파 유적지대에서 발견됐다.

이 도기 조각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기원전(BC) 31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리아인들의 문자가 가장 오래된 문자로 여겨져 왔다.

1994년 팔-이 1차 자치협정 조인

1994년 5월4일 이츠하크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당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1차 팔레스타인 자치협정에 조인했다. 1993년 9월13일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된 ‘오슬로 협정’에 따른 것이다.

이날의 성과는 1980년대 후반부터 중동에 불기 시작한 훈풍이 큰 역할을 했다. 1970년대 반(反)이스라엘 투쟁을 이끌었던 아라파트는 1988년 임시 유엔총회 연설에서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테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스라엘도 1992년 선거에서 강경 리쿠르당이 패배하고 라빈의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유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1차 자치협정의 기본이 된 오슬로 협정은 크게 안보·민간통치·사법·경제 등 4가지 분야에 관한 대략적인 원칙을 밝히고 있다. 주된 내용은 이스라엘이 1967년 점령했던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의 60% 지역에서 자국 군을 철수시키고, 팔레스타인도 테러와 폭력을 근절한다는 것이다. 또 사법권·입법권·경찰력 등을 이스라엘 민간 행정부에서 팔레스타인 통치기구로 이전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아라파트와 라빈이 1차 자치협정에 서명한 지 9일 뒤인 5월13일과 18~19일 이스라엘군의 대부분이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철수했다. 팔레스타인 관료와 경찰들은 즉각 해당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라빈·아라파트와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오슬로 협정에 이어 자치협정을 체결하고 중동 평화를 위해 협력했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노벨상의 권위도 사악한 권력과 반목의 유전자를 궁극적으로 없앨 수는 없었다. 1995년 11월 라빈은 극우파에게 암살됐고 2000년 팔레스타인에서는 2차 인티파다(민중봉기)가 발생했다. 중동의 평화는 그 지역 사람들이 섬기는 신(神)이 책임져야 할 상황이 됐다.

1919년 중국 5·4운동 전개

1919년 5월4일 중국에서 5·4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 후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서 중국의 산둥(山東) 지역에 대한 권익을 일본에 양도하는 안이 승인되었다. 5월1~3일 베이징의 신문에 산둥의 권익을 일본에게 빼앗긴 소식이 보도되자 중국 국민과 베이징 학생들은 4일 톈안먼(天安門)에 모여 친일 매국노인 차오루린(曹汝霖, 사진)의 집에 불을 질렀다.

시위가 확산되자 다음날 경찰총감과 베이징대학교 총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협상을 통해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돤치루이(段棋瑞) 정부가 강경하게 대처해 베이징 학생들의 투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결국 정부는 전국 각지의 압력에 밀려 친일파 관리 3명을 파면시켰고, 6월28일 파리의 중국 대표단은 베르사유 조약의 조인을 거부했다.

5·4운동은 각 계층 민중의 연대로 군벌정권과 제국주의와의 결탁에 정면으로 맞섰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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