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자연, 파키스탄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인도 친구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2020년 6월 2일, 멋지고 훌륭한 인도인 친구를 잃었다.
그는 매사를 대하는 태도가 누구보다 진지했다. 진심을 다해 자연과 사람을 사랑했다. 모국 인도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의 이름은 프라모드 마터다.
지난 3일, 그의 부인이자, 가정과 일터에서 한평생을 같이 해온 파트너 닐리마 마터로부터 짧막한 메시지를 받았다. Pramod passed away yesterday.
2008년 10월 서울에서 처음 만난 이후 지난 12년간 있었던 추억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시아기자협회(아자) 총회 등을 통해 대면했던 순간은 물론 이메일, 소셜미디어 등에 남아있는 흔적들. 그리고 가장 최근인 5월 11일까지 주고 받았던 메시지도 찾아냈다. 그가 내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6월에 아자 총회가 개최된다면 너무 이른 시기여서 참석 못할까봐 걱정이다”라는 짧은 문장이었다. 이에 대해 나는 “10월로 다시 연기됐으니 꼭 참석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그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먼 여행을 떠났다.
로이터 특파원, 인도-파키스탄 전쟁 종군기자, 다큐멘터리 제작자 및 감독자 등으로 활동하며 다재다능했던 친구였지만 내게는 늘 한결 같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처음 만났던 당시 그의 명함에는 ‘SPOTFILM CEO’라고 적혀 있었으며, 짧지 않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타이틀은 변함이 없다.
2008년 아자는 코엑스에서 ‘기후변화와 아시아 기자의 역할’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고, DMZ에서는 ‘Stop CO2’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프라모드는 히말라야 빙하가 녹아내리는 영상을 직접 제작해 청중들에게 설명했다. 10분간 계속된 그의 동영상은 아시아 각국의 기자단과 청중의 시선을 한곳에 모으기 충분했다. 후일담이지만 그는 이 필름을 제작하기 위해 수차례 히말라야 현지를 탐방하는 동안 죽을 고비도 있었다고 했다.
프라모드는 10여년 전 지역매체에서 에디터로 일하는 부인 닐리마와 함께 수십년 살던 델리를 떠나 고지대인 Uttrakhand로 이사했다. 이후 이들 부부는 매년 봄 그 곳에서 에코페스티벌을 개최해 왔다. 매년 시기가 겹치는 바람에 아자 총회에 참석 못하는 미안함을 그는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미스터 리. 참석하진 못하지만, 닐리마와 함께 맘속으로 힘껏 응원한다. 아자의 설립 목적 중 하나인 지구 기후변화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해 해나가자. 아자! 아자!”
아자 회원들이 뜻을 모아 2011년 창간한 온라인 아시아엔과 2013년 창간한 매거진 N에 그는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원고를 기고한 칼럼니스트였다. 전지구적인 환경 문제, 인도 정부의 정책 방향, 카스트제도의 사회적인 폐해, 인도의 유아교육, 한-인 외교, 심지어 파키스탄 친구와 잘 사귀는 법까지 때론 어려웠고 때론 가벼웠던 주제의 글들을 재치 있게 풀어내곤 했다. 지난 4월 22일엔 “코로나19가 인도에 던져준 ‘과제’와 ‘선물’”라는 제목의 글을 보냈는데 마지막 기고문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 것은 2016년 4월 한국에서였다. 그는 열흘 가까이 한국에서 머물며 내게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그 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은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1971년)에 인도의 종군기자로 취재했던 경험이었다. 그의 모국 인도는 이웃나라 파키스탄과 오랜 세월 다퉈왔고, 프라모드 역시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그 현장을 지켜봤다. 하지만 그에겐 케케묵은 앙금보단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파키스탄 친구가 더 소중했다.
우리의 가장 진실한 친구, 영원한 저널리스트이자 다큐멘터리 제작자 프라모드. 휴머니스트인 동시에 자연주의자였던 그의 시선이 담긴 칼럼과 영상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됐다.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아자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한결같다.
“그토록 훌륭한 친구가 우리 곁을 떠났다. 그 뜻은 길이 남을 것이다. 그와 그의 가족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ps: 그의 글 ‘미래의 등불을 밝히자: 타고르와 한용운의 가르침’(http://kor.theasian.asia/archives/70812)을 소개한다. 인도의 대문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와 만해 한용운을 ‘미래의 등불을 켠 이들’이라고 칭했던 이유가 지금에서야 더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