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9일] LA에서 폭동 나던 날

2008년 OECD 9차 환경장관회의 개막

지난 3월29일부터 이틀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12년 OECD 10차 환경장관회의에서는 ‘녹색성장의 이행’이라는 주제로 지구적 차원의 녹색성장 논의를 진행했다.<사진 제공=환경부>

2008년 4월29일 프랑스 파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본부에서 ‘제10차 OECD 환경장관회의’가 개최됐다. 이튿날인 30일까지 이틀간의 일정으로 진행됐던 이번 회의에선 ‘녹색성장 이행(Making Green Growth Deliver)’을 주제로 전 세계 녹색성장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당시 환경 관련 최대 현안이었던 최근의 환경 변화와 추세 등에 대한 깊은 논의도 함께 진행됐다.

환경장관회의에선 같은 해 3월5일 발표된 ‘2030 환경전망 보고서’를 평가하고 범지구적 차원에서 효율적 환경정책 방향 등을 중점 협의했다. 또 OECD 회원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환경정책 협력방안을 비롯, 회원국의 기후변화 정책과 친환경 기술혁신, 범정부적 협력 강화방안 등도 논의된다.

‘2030 환경전망보고서’는 “수 십 년 후 인류가 기후변화와 물 부족, 대기 오염 등으로 고통을 겪게 된다”는 내용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환경 재앙을 경고한 보고서다.

OECD 환경장관회의는 OECD 국가간 환경정책방향을 협의하는 최고위급 회의다. 1974년 제1차 회의가 개최된 이래, 3~5년의 주기로 총 9회의 회의 개최를 통해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최적의 정책대안 제시와 효과적인 이행전략 마련, 각국의 경험 공유 등을 통해 국제환경질서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한편 한국의 유영숙 환경부장관이 프랑스 파리에서 2012년 3월29일부터 이틀간 열린 ‘제10차 OECD 환경장관회의’에서 의장을 맡아 회의를 진행했다.

‘녹색성장의 이행’이라는 주제로 지구적 차원의 녹색성장 논의를 진행했다. OECD 34개 회원국과 러시아, 중국,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 OECD가 초청한 비회원국 정부대표단을 비롯해 유엔지속개발위원회(UNCSD), 유엔환경계획(UNEP), 세계무역기구(WTO), 세계은행, 글로벌녹색성장위원회(GGGI) 등 국제기구 대표, 그리고 산업계 및 NGO 대표 등이 참석했다.

1992년 골프 없는 날(No Golf Day)

1992년 4월29일 ‘제 1회 골프 없는 날’이 진행됐다. 1992년 11월 태국 푸켓에서 열린 <21세기를 위한 민중의 행동> 제3세계 관광 포럼에서 제안(Global Network for Anti-Golf Course Action의 모리타)됐다. 그로부터 한해 전인 1991년 5월 일본 골프장 및 휴양지 반대 네트워크와 아시아 태평양 정보센터가 조사팀을 구성, 아시아 지역의 현장을 직접 조사하고 미국, 멕시코, 호주 등의 관련 자료를 확보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런 노력 끝에 드디어 이듬 해 4월29일 ‘세계 골프장 반대 국제운동 (Global Anti-Golf Movement)’을 구성된 것이다.

1993년부터 많은 나라가 이 날을 ‘노 골프 데이’로 지정하고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사무국은 일본에 위치한 ’Global Network for Anti-Golf Course Action’ 이다.

2004년 윤봉길 의사 의거 72주년, 미공개 사진 대거 공개

1932년 4월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왕 생일(천장절) 기념식장에서 의거를 일으켰다. 그로부터 72년이 지낸 29일 의거 당시 현장의 미공개 사진과 자료가 공개됐다.

윤봉길 의사가 던지지 못한 도시락 폭탄

다큐멘터리 감독 김광만(더채널 대표)씨가 최근 일본 도쿄 국회도서관과 신문사 등을 찾아 발굴했다. 이들 자료 중에는 당일 던지지 못했던 도시락형 폭탄을 찍은 사진과 거사 직전 단상의 일본측 요인들 모습, 당시 일본 신문에 실린 윤 의사 가족 사진, 일본 내무성 보안과에서 작성한 의거 현장 상황도 등이 포함됐다.

윤 의사는 거사 당일 김홍일(金弘壹·전 외무부장관)이 마련해준 물통형 폭탄과 도시락형 폭탄 등 2개를 준비했다. 의심받지 않고 행사장에 지참할 수 있는 물건이 도시락과 물통뿐이었기 때문이다. 윤 의사는 물통형 폭탄을 먼저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 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河端貞次) 등을 사망케 했다. 도시락형 폭탄은 미처 던지지 못한 상태에서 체포돼 그해 12월 일본 가나자와 육군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사진 속 도시락형 폭탄은 보자기에 쌌던 것으로 보이며 뚜껑이 벗겨져 뒹구는 모습이 의거 당시의 긴박감을 전해준다.

이번에 발견된 사진들은 서울 양재동 시민의 숲 안에 있는 매헌기념관이나 윤 의사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세워진 충의사, 독립기념관 등이 소장하지 않은 것들로 의거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1992년 LA 흑인 폭동

1992년 4월29일부터 미국내 한국계 이민자와 흑인간의 갈등이 물리적 사태로 확산된 유혈사태다. 로스앤젤레스(LA)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무장 사태였으며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던 LA폭동은 5월4일에 중단됐다. 55명이 폭동 중 숨졌고 부상자는 2000여명이며, LA 코리아타운의 90%가 파괴됐다. LA 전체의 피해액은 10억 달러 선, 이중 한국인 피해액은 3억5000만 달러로 절반에 이른다. 7000여명이 체포됐다.

폭동까지 이른 데는 중요한 2가지 계기가 있었다. 먼저 1991년 3월3일 LA에서 4명의 로스앤젤레스 경찰관이 흑인 운전수 로드니 킹(Rodney King)을 폭행한 사건이다. 10명의 백인과 한 명의 히스패닉, 한 명의 필리핀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그러나 폭동 당일인 4월29일 이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평결 소식이 전해지자 곧바로 흑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삽시간에 시위대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두 번째 계기는 로드니 킹 사건 13일 뒤인 1991년 3월16일 흑인 빈민 지역인 남부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이른바 ‘두순자 사건’이다. 상점을 운영하던 49세의 두순자는 15세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쳐가는 것으로 오인, 말다툼과 몸싸움 끝에 결국 라타샤 할린스를 총격해 사망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에 대해 배심원은 유죄 평결을 내렸고 검사는 흑인 사회의 반발을 고려해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두순자가 재범의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400시간의 사회 봉사명령과 함께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법원 판결은 흑인들을 극도로 자극시켰다. 사법 시스템 및 한인들에 대한 반감이 확산됐다. LA폭동에서 흑인 지역에서 장사하던 한국인이 흑인들의 주요 폭행 대상이 된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 폭동은 주로 한국인과 기타 아시아인을 향해 진행됐다.

한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12년 4월27일자(현지 시각) ’20년 후 LA의 분열 사라지다(Twenty Years Later, L.A.’s Divisions Fade)’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LA경찰 자료를 인용, “폭동 20년 후 LA경찰의 인종별 구성비가 바뀌었다”면서 “1992년 22% 수준이던 히스패닉계 경찰관은 2012년 들어 43%로 크게 늘어났고, 1992년 당시 60%에 이르던 코카시언 경찰관은 36%로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고 설명했다.

LA경찰은 지난1992년 LA폭동 당시 전체 LA경찰의 60%를 차지하던 코카시언들이 20년이 지난 2012년 36% 수준으로 크게 줄었다고 발표했다. <이미지 출처=월스트리트 저널>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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