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사] 방상훈 조선일보 대표 “저널리즘 퍼스트, 저널리스트 퍼스트에 100년 미래 달려 있다”
사원 여러분, 경자년(庚子年) 새해 복 많이 심으십시오. 지난 한해 여러분의 노력 덕분에 신문 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도 연말 격려금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TV조선 역시 시청률과 실적에서 최고의 성과를 올렸습니다. 조선미디어그룹의 모든 임직원께 감사드립니다.
사원 여러분, 올해 조선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습니다. 100년 기업은 국내 언론사 중에서 처음인 것은 물론 한국 기업 전체에서도 손꼽힐 정도입니다. 조선일보의 100년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거울입니다. 조선일보는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100년 전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민족혼을 일깨우겠다는 일념으로 창간했습니다.
선배들은 창간호에서부터 저항의식을 드러냈습니다. 3면 상단에 있는 대정구년(大九年)이라는 발행연도를 보면, 일왕의 연호인 다이쇼(大正)의 정(正)자가 거꾸로 새겨져 있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검열 속에서도 특유의 풍자로 일제에 저항했던 것입니다.
선배들이 조선일보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지만 일각에서 지적하는 대로 부족하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보급운동을 시작했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합심해 출범시킨 최대 항일운동단체 ‘신간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일제로부터 경제독립을 주창한 물산장려운동의 가장 큰 지원군이기도 했습니다. 또 대표적 저항시인인 이육사, 백석, 심훈, 채만식, 홍명희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거나 조선일보를 통해 한국 문학사에 이정표가 된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해방 이후에 조선일보는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우리나라의 핵심가치를 지키는데 앞장섰습니다. 1960년 4월18일 밤, 종로4가에서 고려대생들을 습격한 정치깡패들의 사진을 특종 보도한 조선일보 4월19일자는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됐습니다.
조선일보는 우리 사회와 시민의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수많은 캠페인도 주도해왔습니다. 환경 캠페인은 1992년 ‘쓰레기를 줄입시다’로 시작해 ‘자전거를 탑시다’ ‘샛강을 살립시다’로 이어지며 자원 재활용과 환경보호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1995년에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정부와 함께 대대적인 정보화 운동을 펼쳤습니다. 가격을 확 낮춘 보급형 PC가 각 가정에 보급되고 전국에 초고속 인터넷 망이 깔리면서 우리나라가 IT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을 때 한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앞장서 실천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언론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때로는 지역갈등과 이념 분쟁에 시달리고 정권에 밉보여 혹독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조선일보는 ‘할 말은 하는 신문’으로 정론직필과 진실 보도라는 저널리즘의 가치를 지켜왔습니다.
조선일보는 오는 3월, 100주년 창간 일에 즈음해 1920년부터 1999년까지 발행된 26만1589면, 295만건의 기사를 조선닷컴 등을 통해 공개합니다. 3년간 100억원을 투자해 일제 때부터 디지털 시대 직전까지의 방대한 자료를 디지털화한 것입니다.
이번에 공개하는 디지털 기사는 누구든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옛 한글을 현대어로 변환한 기사도 함께 제공합니다. 조선일보가 우리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겁니다.
사원 여러분, 제가 조우회 인사말을 통해 공개했듯이, 조선일보는 상반기 안으로 워싱턴포스트의 인공지능(AI) 콘텐츠 관리시스템 아크(ARC)를 접목시킨 새로운 미디어 서비스를 선보입니다. 이를 위해 종편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의 투자를 단행하고 있습니다.
아크(ARC)는 기존 시스템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쉽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미디어 전용 운영체계입니다. 간편한 조작만으로도 텍스트와 이미지, 동영상 편집을 하고 세계 어떤 언론사의 운영체계보다도 신속하게 콘텐츠를 유통시킬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크(ARC)는 AI시대의 핵심인 데이터 저널리즘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의 데이터가 쌓이면 독자 개개인에 최적화된 기사와 맞춤형 광고를 더 정교하게 제공할 수 있고, 데이터 기반의 다양한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사원 여러분, 현재 우리 국민의 대다수가 스마트폰을 통해 뉴스를 소비하고 있고, 뉴스의 형식 역시 전통적인 문자를 넘어 이미지와 동영상, 대화형 콘텐츠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습니다. 신문과 디지털이라는 플랫폼 구분도 무의미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새로운 100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신문과 디지털의 장벽을 없애야 합니다.
신문과 디지털을 단순히 통합하는 것을 넘어, 신문의 외연을 확장해 디지털에서도 저널리즘의 가치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신문과 인터넷, 소셜미디어 등 모든 플랫폼에서 저널리즘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문자와 음성, 영상 등 콘텐츠의 기존 영역을 넘어서는 혁신을 해야 합니다. 조선미디어는 이런 변화와 혁신을 통해 향후 수년 내에 2000만 오디언스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사원 여러분, 이제는 종이신문 퍼스트나 디지털 퍼스트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가짜뉴스가 범람하고 많은 국민들이 뉴스를 믿지 않는 시대에 언론은 저널리즘 퍼스트라는 기본 정신을 되새겨야 합니다.
저널리즘 퍼스트는 언론 본연의 비판정신과 함께 사사로운 이익에 휩쓸리지 않는 불편부당한 기사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인터넷과 모바일의 등장으로 속보의 가치가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저널리즘의 본질은 사실 보도라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저널리즘 퍼스트를 위해서는 저널리스트 퍼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조선일보가 지면을 통해 수많은 스타기자와 칼럼리스트를 배출했듯이, 더 넓은 디지털을 통해서도 1000만, 2000만 독자를 지닌 스타기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키우겠습니다.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창의적인 콘텐츠를 선보일 수 있고 그런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조직문화도 더 유연하게 변화할 것입니다. 젊은 세대들이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새로운 장(場)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조선일보가 기자정신이 살아있는 신문이라고 자부합니다. 이 가치는 조선일보가 존재하는 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널리즘 퍼스트, 그리고 저널리스트 퍼스트에 조선일보의 100년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회사는 새로운 길을 가는데 기자를 최우선으로, 기자정신과 역량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사원 여러분, 안 가본 길을 가는 데 대한 두려움과 의구심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변화가 두려워 그 자리에 안주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좌우할 변화의 여정에 ‘제2의 창간 정신’으로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말씀에 ‘내가 하나님을 믿나니 하나님과 함께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 역시 조선미디어의 사원 여러분과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거뜬히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1월 2일
사장 방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