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암 이철영 평전’ 출판기념회 27일 세종시 초려역사공원
[아시아엔=편집국] 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학자이자 항일운동가로서 일제 침략에 항거하다 수차례 옥고를 치른 끝에 100년 전인 1919년 별세한 성암(醒菴) 이철영(李喆榮)(1867.3.17~1919.12.6) 선생 평전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출판기념회는 초려문화재단과 숭의사보존사업회가 주관하고 국가보훈처·세종시·충남도·공주시·광복회·성균관·3.1운동및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한신공영·남양유업 등의 후원으로 27일 오전 11시 세종시 초려역사공원 ‘갈산서원’에서 열린다.
<성암 이철영 평전>을 집필한 이상익 부산교대 교수는 “성암의 삶을 통해 ‘애국충정’뿐 아니라 ‘올바른 문명의 전망’을 함께 발굴·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성암 선생의 직계 후손인 이연우 숭의사보존사업회 회장은 “100주기를 맞아 선생의 학덕과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되돌아봄으로써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이때 사회와 국가를 위한 도리가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성암 이철영 선생은 조선 중기의 효종·현종·숙종 대에 문신·학자로 이름 높았던 이유태(李惟泰)의 9대손이며, 이홍제(李弘濟)의 아들이다. 충청남도 공주 출신으로 1904년 일본인들이 철도를 부설한다는 명목으로 선영을 침범하자 유림의 진정서를 소지하고 관계자를 찾아가 항의하였다. 이듬해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기의려문’(起義旅文)을 지어 일제에 항거하려 하였으나 거사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1909년에는 일제가 주도하는 호적에 입적하기를 거부하며 일제의 간악한 침략과정을 열거한 장문(長文)을 지어 부여주재소를 통하여 일본정부에 전달하려고 하였다가 홍산경찰서에 이송된 뒤 석방되었다.
1914년에는 부여의 순사주재소에 연행되어 70여 일간 구금되었으며, 1918년에는 호적에 입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여의 주재소에 잡혀갔다가 풀려나는 등 일제의 정령(政令)을 모두 거부하여 숱한 고초를 겪고 소유한 산판(山坂)을 수탈당하기도 하였다.
투옥되어서도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아 일본경찰도 존경의 표하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성리(性理) 논쟁의 절충론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강설(四上講說)을 지어 후학 양성에 힘썼다.
잦은 옥고의 후유증으로 1919년 순국하였으며, 공주시 상왕동 중동골의 숭의사(崇義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성암집>(醒菴集) <내범요람>(內範要覽)과 옥중일기인 <부풍일기>(扶風日記)가 있다. 항일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인정받아 1977년 대통령표창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