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1일] 2006년 네팔 갸넨드라 절대왕정 붕괴

2006년 네팔 국왕 절대군주제 포기 발표

2006년 4월21일 당시 네팔 국왕 갸넨드라는 “행정권력을 국민에게 이양, 절대군주제를 포기하고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갸넨드라는 또 7개 정당 연합체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신임 총리를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오랜 내전에 피폐화된 경제와 왕을 포함한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에 대한 네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계속돼 왔고 국왕이 이에 굴복한 것이다. 그러나 네팔의 민주화 요구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네팔 국민들은 입헌군주제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총파업을 이끄는 7개 야당연합은 국왕의 제안에 대해 “의미없고 부적절한 것”이라며 공식 거부하고 총파업과 대규모 시위를 계속했다. 국왕의 권력이양이 발표된 다음날인 4월22일 10만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군경과 대치했다. 이날 시위에서 150여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날 수도 카트만두 일원에는 주간통금령이 내려졌지만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졌다. 카트만두 외곽에서는 “왕정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요구하며 시내로 진입하려는 수천 명의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 수십 명이 다쳤다. 입헌군주제 회복을 위한 민주화 요구가 아니라 국왕 하야와 군주제 폐지라는 민주혁명의 수준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혁명보다 네팔의 안정을 바라는 미국과 인도, 유럽연합(EU) 등은 행정권력 이양과 야당연합의 총리후보 지명을 뼈대로 한 국왕의 타협안을 야당이 수용하기를 촉구했다.

갸넨그라는 지난 2002년 의회를 해산하고 입법·사법·행정권을 모두 장악했었다. 그러나 왕실 내부의 치열한 권력다툼과 살인행위 등이 불거지면서 국민의 거센 압력에 직면했다.

그 뒤 네팔 왕정은 2008년 5월28일 당시 제헌의회가 압도적인 투표로 군주제를 폐지했다. 1768년 이후 240년 된 네팔 ‘샤’ 왕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 뒤 네팔은 농민들의 지지를 업고 국토의 절반가량을 장악하고 있는 마오이스트 반군이 권력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했다.

 

2001년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에 농둑만 선출

2001년 4월21일 베트남의 실질적 최고지도자인 공산당 서기장에 농둑만(Nong Duc Manh) 당시 국회의장이 당선됐다. 베트남 공산당은 제9차 전당대회 사흘째인 이날 실시한 투표에서 보수파인 레카피유 후임으로 앞으로 5년간 당과 국가를 이끌어갈 신임 서기장에 개혁 성향의 농둑만을 압도적 지지로 선출했다.

농둑만 서기장은 선출 다음 날 열린 전당대회 폐막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최우선 과제로 경제발전과 부패척결을 제시했다. 소수민족인 따이족 출신인 농둑만은 뛰어난 친화력과 온화한 성품, 개혁 이미지 등으로 국민들의 높은 인기를 얻고 있으며,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호치민의 숨겨진 아들로 소문이 나 있다.

토목기사 출신인 그는 1958년 ‘공산 혁명’에 가담한 뒤 1963년 정식으로 공산당원이 됐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 북부 박타이성 토목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으며 1986년 제6차 전당대회를 앞두고 공산당 중앙상임위원이 됐다. 1991년 공산당 정치국원이 된 그는 1992년 국회의장에 올랐다

농둑만 서기장은 2001년부터 2011년까지 베트남의 제6대 당 서기장을 지냈다. 10년간 당 서기장이라는 베트남 최고 권력자 자리를 유지한 것. 호치민 주석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루머가 따라다닐 정도였다. 호치민 주석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동네 아저씨처럼 친근한 ‘아버지’다.

농둑만은 제11차 전당대회 폐막 하루 전인 2011년 1월18일 명예롭게 퇴진했다. 베트남 역사에서 도이모이(doimoi, 쇄신)정책을 이끌어온 세대의 퇴진 이후 신임 당서기장은 응우옌푸쫑(베트남어: Nguy?n Ph? Tr?ng, 1944년 4월14일 출생)이 이어받았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개념을 만든 당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이론가인 그는 도이모이의 성공을 계승, 대외개방 및 개혁 정책의 지속적 추진을 확인하는 한편 사회주의 노선과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 원칙도 재확인했다.

 

1997년 필리핀의 대통령 마카파갈 사망

1997년 4월21일 필리핀의 제 9대 대통령 마카파갈(Macapagal.Diosdado)이 영면에 들었다. 1910년 9월28일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마카파갈은 어려서 부유한 지주들의 천대를 자주 받고 자랐다. 추수 뒤 소작인들 가족이 먹을 양식도 안 되는 소량만 남기고 곡식을 모두 가져 버리는 기억들은 그가 훗날 정치인이 됐을 때 부자에 대한 반감을 정책에 반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32년 필리핀 국립대에서 법대 예과를 이수, 국가고시에 입학한 뒤 농림수산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1936년 최고성적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1939년 9월1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2년이 지난 1941년 그는 당시 대통령 퀘존의 지방 보좌관으로 활동했다. 일본 식민지배 당시 그는 람세이 게릴라에 지원, 루손 동부 중심지를 통솔하는 장군으로 활동했다. 종전 후인 1947년 필리핀 변호사협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1953년 팜팡가 시장 당선을 계기로 본격적인 정치행보를 시작했다. 국회의원을 거쳐 1961년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최저임금법과 지방 보건법, 옥수수 쌀 수출장려법, 국영지 민영화 사업 등이 5년 임기동안 그의 주요 민생정치 실적이다.

그의 딸 마리아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이 1998년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당선됐고, 재임 중 퇴출된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민중봉기로 축출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아로요는 조지타운 대학교 재학 때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되는 빌 클린턴과 동기동창으로 함께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 주변에는 그녀 자신을 포함해 대통령이 여럿 있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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