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0일] 히틀러 출생일에 추종자가 총기난사
1981년 한국 제1회 장애인의 날
1981년 4월20일 한국에서는 제1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계속적으로 증가추세에 있는 장애인들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유엔이 1981년을 ‘세계 장애자의 해’로 정하자 한국도 ‘장애인의 날’을 제정하고, 같은 해 6월 ‘심신장애자복지법’을 제정했다. 1991년부터는 장애인의 날이 법정 기념일로 지정됐다. 근거 법 조문은 장애인복지법 제 14조다. 현재 법정기념일인 ‘장애인의 날‘ 기념행사의 주최기관은 정부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와 ‘장애인의 날 행사 추진협의회’다. 기념식 공식 행사에서는 장애인인권헌장낭독, 장애인복지 유공자에 대한 훈·포장과 표창이 수여된다. 1997년 제정된 ‘올해의 장애 극복상’을 통해 장애를 훌륭하게 극복하는 장애인을 발굴, 시상한다. 4월20일부터 1주일 동안을 장애인 주간으로 정해 각 지방자치단체 및 장애인 단체별로 체육대회를 비롯한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펼친다.
1990년 장애인 취업을 위한 ‘장애인 고용촉진법’이 제정돼 이듬해인 1991년부터 발효됐다. 한국에서 이 법은 지난 1955년 국제노동기구(ILO)의 ‘장애자 직업재활에 관한 권고’로 촉발됐다. 1981년 ‘심신장애자복지법’에서 1989년 ‘장애인복지법’으로 전면 개정된 데 이어 1990년 ‘장애인고용촉진법’으로 제정된 것이다.
2010년 미국 멕시코만 기름유출 사고 발생
2010년 4월20일 미국 멕시코만 해저의 영국 석유업체 비피(BP)의 원유시추시설인 트랜스오션사(社)의 ‘딥워터 호라이즌’호(號)가 폭발, 유정과 시추선을 연결하는 2개의 관이 터지면서 최악의 기름 유출(Oil spilt) 사고가 발생했다.
원유유출 지점이 해저 1500m에 위치, 1㎠당 635kg에 이르는 수압과 낮은 수온에 기름과 함께 분출되는 메탄가스가 슬러시(slush 질척한 얼음)을 만드는 등 최악의 피해가 초래됐다.
이 사고로 11명이 숨지고 최대 490만배럴로 추정되는 막대한 양의 원유가 바다를 시커멓게 오염시켰다. 사고 해역은 해양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된 ‘죽음의 바다’가 됐다.
멕시코만과 인접한 루이지애나·플로리다·미시시피주 등은 어업과 관광산업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비피는 공사 기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안전수칙을 무시했다는 의혹에 휩싸였고, 미국 정부와 민간으로부터 수백억달러의 피해보상 및 손해배상 소송에 직면했다.
1989년 1100만 갤런의 기름이 바다로 유출돼 1900㎞에 이르는 알래스카 연안을 오염시킨 유조선 엑손 발데스호 기름 유출 사고 이후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였다.
일일 2만~10만 배럴이 유출되는 등 사태가 장기화 되자 버락 오바마(Obama) 미 대통령은 2010년 6월15일 위기 극복을 위한 ‘오벌 오피스(Oval Office)’ 연설을 하였다. 이전 오벌 오피스 연설은 9년 전인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9.11 직후였다.
이런 극단적 환경에서 로봇 잠수정을 통한 원격 작업으로 차단 작업을 진행했다. 원유유출 발생 후 85일 16시간 25분 만인 2010년 7월15일 해저 시추공에 무게 75t짜리 차단캡을 설치, 원유 유출을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영국 석유회사 BP는 사고 5개월만인 9월 17일 멕시코만 해정 유정이 매장 기름과 유정 사이를 연결하는 시추 파이프에 구멍을 뚫어 밀도 높은 시추용 기름과 시멘트를 주입해 올라오는 기름을 차단하는 ‘바텀 킬(bottom kill)’ 방식으로 완전 밀봉됐다고 발표했다.
미국 멕시코만 원유 유출 사고 1주년만인 2011년 4월 중순 뉴욕타임즈는 “지금까지 수백 명의 과학자들이 3만5000여장의 사진을 찍고 4만 건이 넘는 표본을 채취해 연구한 결과 심해의 자정 능력은 인간이 우려했던 것보다 월등했지만, 돌고래 사산이 급증하는 등 생태계 피해는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2011년 2월 멕시코만 해안에서 발견된 죽은 돌고래 59마리 중 36마리는 사산된 새끼 돌고래였다. 돌고래 번식 철인 당시 죽은 새끼 돌고래의 수는 2002 ~2009년 평균치보다 9배가량 늘었다. 유출된 원유가 돌고래의 면역 체계를 약화시켰고, 이 때문에 원래부터 존재하던 바이러스로부터의 공격을 어린 돌고래들이 이겨내지 못한 것으로 분석됐다.
사고 후 609마리의 바다거북이 죽은 채 발견됐다. 새끼 참다랑어는 2010년 기준 20%가 감소했다. 인디펜던트 보도에 따르면, 1989년 엑손 발데스 기름 유출 사고 발생 후 3년 뒤 청어의 어획량이 갑자기 급감했다.
과학자들은 그러나 “1년간 보여준 깊은 바다의 자정(自淨) 능력은 예상보다 뛰어났다”고 밝혔다. 깊은 바다의 원유가 사라진 이유는 엄청난 수압과 원유를 분해하는 심해 박테리아 때문으로 밝혀졌다. 육지에선 물과 섞이지 않는 기름이 막대한 수압이 가해지는 심해의 극한 조건에서는 작은 입자로 부서져 분해가 쉽다는 것이다.
원유와 함께 분출됐던 약 20만t의 메탄가스도 거의 자취를 감췄다. 원유가 분출될 때 메탄가스 농도는 평상시의 10만 배까지 치솟았었다. 그러나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연구팀이 지난가을 멕시코만 207개 지역의 수질을 분석한 결과 메탄가스 농도는 사고 이전으로 회복돼 있었다.
1999년 미 컬럼바인 고교 총기사고로 15명 사망
1999년 4월20일 오전 11시30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근교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검정 코트 차림의 괴한 2명이 총을 들고 식당으로 들이닥쳐 총을 난사했다. 점심시간을 맞아 학생들이 모여든 식당은 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들은 식당은 물론 도서관과 복도, 심지어 지붕 위까지 올라 다니며 총을 난사하고 사제폭발물을 던졌다. 당시 이 학교 학생 1800여 명은 5시간 가까이 지옥 같은 참상을 겪어야 했다. 이 사고로 자살한 범인 2명을 포함해 15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총상을 입었다.
범인은 이 학교 3학년 에릭 헤리스와 딜런 클레볼드로 확인됐다. 두 학생은 특히 소수민족 학생과 운동선수 등을 골라 공격했다. 히틀러를 숭배하는 폭력단체의 일원으로 밝혀졌다.
이날은 히틀러의 출생 110주년 되는 날이었다.
1889년 4월20일 태어난 히틀러(Hitler. Adolf)는 나치 독일을 이끌었던 정치가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민족 문제로 고심하던 당시 그는 열렬한 게르만 민족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 1913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에 자원 입대했고, 1918년 독일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자 베르사유 체제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19년 독일노동당에 가입한 그는 차츰 세력을 확장해, 국가사회주의 노동당(나치당)의 제1인자로서의 입지를 구축해갔다. 도시와 농촌에서 중산 계급의 지지를 확보한 나치당은 합법적 의정 활동을 통해 대중 정당으로 성장한 결과, 1930년에는 독일의 제2당이 됐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힌덴부르크에게 패했으나, 1933년에 군 수뇌부와 자본가들의 지지를 얻어 나치당을 제1당으로 만들고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1934년 총통에 취임한 히틀러는 눈부신 경제 발전과 외교적 성공을 이룩해 제3제국의 국력을 유럽 제일로 끌어올렸고, 1939년 불시에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게르만 민족 제일주의의 기치 아래 수행된 이 전쟁에서 그는 이른바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유대인 탄압을 자행했다. 그러나 독일의 패배가 확실해진 1945년 4월30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68년 이주노동자 혐오 부추겨 성공한 정치인
1968년 4월20일 영국 버밍엄에서 보건장관을 지낸 국수주의 정치인 에녹 파웰(Enoch Powell,?1912~1998)이 충격적인 연설을 했다. ‘피의 강’이라 이름 붙은 이 연설은 이민자들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인종적 증오감을 부추기는 내용이었다. 그는 연설에서 “이민자들이 영국을 파괴하고 있다. 내 눈에는 피가 흘러넘치는 테베레강(로마를 흐르는 강)이 보인다”고 목청을 높였다.
피부 빛과 관습이 다른 이민자들이 영국을 ‘피 바다’로 만들 것이라는 엽기적인 예언이었다. 그리스학 교수 출신답게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시를 인용했지만 그 의도는 추악했다. 보수당 당권 도전을 앞뒀기 때문이다. 당시 보수당은 즉각 그를 ‘예비 내각(shadow cabinet)’에서 쫓아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영국인들은 그 연설을 지지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지지 시위까지 벌였다. 보수당은 두 달 후 치른 총선에서 예상외로 선전, 정권을 되찾았다. 파웰의 연설 덕분이라는 해석도 많았다. ‘극우주의자’ ‘파시스트’로 비난받았지만 정치인으론 장수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