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5일] 호요방 중국 공산당 총서기 사망

2007년 ‘반FTA’ 분신 허세욱씨 숨져

2007년 4월15일 오전 11시23분께 한미FTA(자유무역협정) 협상장 근처에서 분신한 허세욱(당시 54세)씨가 숨을 거뒀다. 같은 달 1일 서울 한남동 하얏트 호텔 정문 앞에서 인화성 물질을 몸에 붓고 불을 붙여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지 보름 만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영면에 든 것이다. 가족의 동의 아래 한강성심병원에서 피부 이식수술 등 치료를 받았던 허씨는 이날 갑자기 호흡 곤란을 일으켜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끝내 숨졌다. 직접적 사인은 패혈증이었다.

당시 한미FTA 반대 대책위는 “허씨의 죽음은 전적으로 노무현 정권 탓”이라며 “한미FTA 무효화와 노 정권 퇴진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 H운수에서 택시운전사로 일해 온 허씨는 민주노총 조합원과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으며 경기 안성이 고향인 것으로 전해졌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 수교후 터키 첫 방문

2005년 4월15일 노무현 대통령이 1957년 수교 후 한국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세제르 당시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 당시 총리와 잇따라 회담을 갖고 경제교류와 투자증진, 정보기술, 방위산업분야 등 양국간 실질 협력관계 강화 방안에 대해 집중적으로 협의했다.

또 터키와 가까운 이라크 내 자이툰 부대의 원활한 활동과 안전을 위한 협력체제 구축도 논의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특히 한국전에 참전한 오랜 혈맹국인 터키와 유대를 더욱 강화하면서 이슬람권에 우리나라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

2002년 중국 여객기 김해에서 추락

2002년 4월15일 오전11시22분쯤 에어 차이나(AIR CHINA·중국국제항공공사) 소속 CA-129편 보잉 767-200 여객기가 김해국제공항 북방 4.5km 떨어진 경남 김해시 지내동 동원아파트 뒤편 신어산 기슭 돗대산 정상 부근에 추락했다.

사고 항공기엔 한국인 136명과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19명 등 승객 155명과 승무원 11명 등 모두 166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 중 118명이 사망 및 실종됐고, 48명이 구조돼 생존한 것으로 집계됐다. 생존자 38명은 전체 탑승객의 23.5%로 항공사고 치고는 이례적으로 높은 편이었다.

2002년 동티모르 첫 대통령에 구스마오

2002년 4월15일 동티모르의 초대 대통령에 독립영웅 사나나 구스마오의 당선이 확정됐다. 한달 여 뒤인 5월20일이면 21세기 첫 독립국가로 탄생하는 동티모르의 초대 대통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구스마오는 이날 시작된 대통령 선거 개표에서 80% 이상의 압도적 지지로 사비에르 도 아마라 티모르사회민주연합 총재를 누르고 당선됐다. 이번 투표에는 유권자 43만9000명 가운데 86.3%인 37만9000명이 참가했다. 구스마오는 9개 정당의 연합후보로 출마했다.

구스마오는 애초 사제를 꿈꿨으나 1975년 포르투갈에서 독립한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에 강제 편입되자 독립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어 1986년 독립운동 최고기구인 동티모르 민족해방군 사령관에 오른 그는 1992년 인도네시아 정부에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동티모르인들이 그를 위한 노래를 만들어 부르며 사진을 간직하고 다닐 만큼 확고한 지도자가 됐다. 그는 1999년 9월 석방됐으며 그해 10월 인도네시아군이 동티모르에서 철수한 뒤 해방 동티모르 건설에 앞장섰다.

구스마오 초대 대통령 집권으로부터 꼭 10년 뒤인 지난 4월16일 독립 10주년을 맞은 동티모르 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이번 대선에서는 타우르 마탄 루악 전 군참모총장(56)이 선출됐다.

루악 후보는 대선 결선투표에서 27만5441표(61.23%)를 얻어 17만4386표(38.77%)를 얻은 프란시스코 구테레스 전 국회의장(58)을 눌렀다. 동티모르의 제2대 대통령은 라모스 호르타 대통령이었다.

1989년 호요방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 사망

1989년 4월15일 호요방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심근경색으로 돌연 사망했다. 호는 1986년 12월부터 중국대륙 전역으로 확산된 대학생들의 민주화요구시위를 효과적으로 진정시키지 못했다는 당내 비판을 받아오던 중 중국 공산당이 1987년부터 전개한 반부르조아자유화운동 와중에 실각했었다.

1915년 호남성에서 빈농집안에서 출생한 호요방은 14세때 중국 공산당에 입당, 오랜 기간 공산청년단에서 일했으며 항일전쟁기간 중 제2야전군에서 등소평의 부하로 인연을 맺었다.

호는 1976년 모택동의 사망과 이후의 강청, 조문원 등 4인방의 몰락으로 등소평의 실용주의 노선이 득세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을 제일먼저 감을 잡았다.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유도하기 위한 일련의 토론회를 전개, 당시 집권자 화국봉이 주장했던 “모택동의 모든 결정과 지시는 무엇이든 옳다”는 범시론(凡是論)을 격파했다.

호는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81년 화국봉을 제치고 당중앙위 주석에 올랐고, 이듬해 주석제가 폐지되자 당 총서기로 선출됐다. 호는 그러나 자신을 포함한 개혁파들이 1978년 이후 추진한 개혁개방정책 때문에 정치민주화와 대학생 시위로 이어져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났고, 물러난 지 2년 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1985년 남아공 잡혼금지법 철폐

1985년 4월15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종차별정책으로 악명 높은 흑백인종 간의 결혼을 금하는 ‘잡혼금지법’을 전격 폐지했다. 또 흑인이 백인과 결혼하는 것은 물론 연애, 섹스를 하다가 적발되면 8년의 강제노동형을 부과하는 ‘배덕법(背德法)’도 함께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1984년 7월 의회 특별조사위원회가 두 법의 폐지권고를 정부가 받아들인 결과였다.

남아공 정부는 인종간의 교류금지를 주요 정책으로 추진해왔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대한 안팎의 비난이 높아지고 무기금수와 경제제재 등에 의해 국제사회에서 고립됐기 때문에 이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됐다.

1912년 김일성 탄생

1912년 4월15일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이 태어난 날로, 북한에서 태양절(太陽節)로 기념한다.

1997년 7월8일 김일성의 삼년상 탈상에 맞추어 선포됐다. 당시〈김일성 동지의 혁명 생애와 불멸의 업적을 길이 빛내일데 대하여>라는 결정서에 의거한 것이다. 이때 주체연호도 함께 채택됐다.

김일성의 생일은 이전부터 ‘4·15 명절’ 등으로 불리는 북조선 최대의 명절이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의 5개 기관이 공동으로 발표한 이 결정서에 따라 한 단계 더 격상돼 ‘태양절’이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태양절에는 각종 전시회와 체육대회, 노래 모임, 주체사상 연구토론회, 사적지 참관, 결의대회 등의 행사가 성대하게 열린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위성 로켓 발사 등 매년 태양절을 기념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시행돼 지구촌이 온통 북한을 주목한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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