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이상빈 경주이씨중앙화수회 사무총장···불굴의 의지·정직·인화의 삶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어젯밤 한통의 문자가 왔다. “[부고] 이상빈 경주이씨중앙화수회 사무총장께서 7월 3일(수) 별세하셨기에 알려드립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02-2072-2020) 발인 7월 5일
순간 고인의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필자는 금년초 ‘아시아엔’이 세 들어 있는 경주이씨 중앙화수회관 현관 앞에서 조우하고 벌써 반년이나 흘렀나 싶었다.
KBS 기자로 30년 이상 봉직한 그는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충북 보은의 가난하지만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만년을 종친회 사무실에서 봉사한 것에 대해 필자는 남 달리 보고 있다.
어린 자녀들은 떠받드느라 연세 드신 분들은 소홀히 하는 세태 속에, 생전 뵙지도 못한 조상님들을 섬기는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런데 이상빈 총장은 그 일을 조곤조곤 무던히도 잘 해냈다.
그를 처음 만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같은 건물 아래 위층에 있으면서도 식사 자리 기껏 서너번 못하고 그른 보내게 돼 너무 아쉽고 미안함마저 든다.
누구를 보내고 기억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 기자로 청춘을 바친 그가 해온 일이다.
이제 그가 가는 길은 필자가 대신 기록하여 기억하려 한다. 마침 그 자신이 남긴 자기 소개글이 있어 이를 필자의 재구성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려 한다. 그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47년 11월 4일 충북 보은군 산외면 길탕리 295 출생 △대전농업전문학교(1963~1968)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신문방송 최고위과정(1995) △고려대 생명환경과학대학원 최고위과정(2013~2014) △KBS청주방송총국 보도국장(1995~1998) △KBS심의평가실 심의위원(~2005 정년) △충북일보 부사장(2006~2008) △월드 디자인 비상임감사(2009~2012) △한국소비자원 비상임감사(2012.10.12~2019.5.13)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사무총장(2010~현재)
KBS 記者로 시작해 忠北日報 副社長까지 言論界에서 35년 5개월간 근무하면서 신념과 정직함으로 일관해 이룬 보람 있는 업적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흔히 무관(無冠)의 제왕(帝王) 이라는 힘을 약한 자와 서민대중의 편에서 그들의 권익보호와 증진을 위해 사심 없이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2012년 9월, 소비자의 권익을 증진하고 소비생활의 향상을 도모하며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국가에서 설립한 한국소비자원에서 非常任監事를 모집한다는 사실을 알고 분에 넘치는 듯하나 남은 제 인생에 마지막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주저하지 않고 지원해 그해 10월 이명박 대통령의 임명장을 받고 2년 임기를 마쳤으며···(중략)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항상 자신감 있고 당당한 아이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적은 규모의 농토를 경작하면서 7남매의 자녀 양육과 교육을 책임진 가난한 농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시절은 전혀 기가 죽지 않고 공부해 성적이 좋았고 성격도 활달해 항상 앞에서 지도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가정형편이 어려워 中學校 진학을 못하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며 동네 書堂에서 선배들 틈에 끼여 원하지 않던 漢文공부를 했고 거기서도 당당하게 호랑이 같은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이듬해는 부모님 몰래 중학교 진학시험을 치르고 합격통지서를 내밀어 어렵게 허락을 받아 초등학교 동창들의 1년 후배로 입학해 반장과 학생회장도 무난히 해냈습니다. 특히 한문에 관해서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해 진학을 제때 못했던 부모님의 원망을 감사한 마음으로 돌릴 수 있었지요.
고등학교 진학도 어려워 망설이다 장학금혜택이 주어지는 5년제 신설 專門學校를 지원해 자취생활과 가정교사 등으로 어렵사리 눈물적신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 이상의 학업을 계속하지 못한데 대한 구구한 변명에 변함이 없는 제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것이 늘 부끄럽고 큰 흠집으로 남아 있습니다.(중략)
눈물겨운 학창시절을 끝낸 후 바로 사회생활에서 도전에 적극적이고 승부욕을 강하게 키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海兵隊를 지원했고 혹독한 군대생활에서 경험한 인내심으로 무슨 일이든 쉽게 포기하거나 주저하지 않는 장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힘이 바탕이 돼 5년제 전문학교 그것도 축산학을 전공한 농학도로서 겁도 없이 KBS를 지원해 특채되었고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훔쳐 배운 어설픈 글 솜씨로 작성한 기사를 밤새 읽고 또 읽는 뉴스전달 리포트 연습을 지독하게 해 로컬종합뉴스 앵커로 발탁, 여러 해 시청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선배들을 제치고 報道 責任者를 맡아 간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날고뛴다는 수십 명의 공채 기자들을 잘 이끌고 公營放送의 높은 위상을 지켜나가는 데 큰 실수가 없어 상사로부터 신임이 두터웠지요.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지역 報道局長 재직 때인 40대 후반에 뜻하지 않게 위암수술을 받게 돼 많은 지인들에게 걱정과 실망을 끼쳐드렸고 직장에서 한창 잘 나가던 승승장구의 길을 접고 책임간부가 아닌 한적한 심의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건강을 회복해가며 남은 근무기간을 잘 마무리하고 정년을 했습니다.(중략)
나이가 더 들면서는 왠지 조상숭모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 2010년 5월부터는 사심 없는 봉사정신을 앞세워 경주이씨중앙화수회(종친회) 事務總長을 맡아 조상님의 제향(祭享)을 정성스레 올리고 宗親들의 화합과 조직활성화에 일조하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며 후회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