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3일] 제주 4·3사건, 국가의 첫 사과
2009년 미국에서 아시아계 이민자 총기난사 참사
2009년 4월3일 중국계 베트남 이민자인 지벌리 웡(Jiverly Wong)은 미국 뉴욕 빙햄튼 이민센터에 들어가 총기를 난사했다. 100여발을 쏜 것으로 알려진 이 사고로 13명이 죽고, 웡 스스로도 목숨을 끊었다.
웡은 참사 전 지역방송국에 경찰이 그를 괴롭혔다는 내용을 편집증적으로 언급하는 편지를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또 그의 영어 억양을 트집 잡는 사람들 때문에 상심해왔고, 최근 해고로 매우 좌절감을 느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로 미국 경제가 흔들리면서?저소득층을 구성하는 비(非)백인 이민사회를 중심으로 생계에 압박을?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 현지 언론에서는 이 문제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꼭 3년이 지난 2012년 4월2일 똑같은 총기 난사 사건이 미국에서 벌어졌고, 이번에도 아시아계 이민자가 용의자로 체포됐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시내 오이코스 신학대학 구내에서 이날 오전 10시33분쯤(현지 시각) 40대 한국계 미국인 남성이 총기를 난사해 7명이 숨지고 3명이 부상했다. 한국계 목사 김모씨가 10년 전 설립한 대학으로 신학, 음악, 간호학, 동양의학 등의 학과가 개설돼 있다. 목격자에 따르면, 카키색 복장을 한 건장한 체격의 용의자가 간호대학 강의실로 들어가 교실에 있던 한 학생에게 총격을 가한 후 강의실에 있던 다른 학생들을 상대로 총기를 마구 쏘아댄 뒤 도주했다.
2007년 에이즈양성 10대 러 소녀의 분노 행각
2007년 4월3일(한국시각) 러시아 관영 리아노보스티 통신은 에이즈양성 판정을 받았던 17세 러시아 소녀가 세상에 대한 보복차원에서 무려 100명의 남성들과 성관계를 해와 러시아 사회에 충격에 빠졌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극동의 캄차카반도 내 페트로파블로프스크-캄차트키시(市) 경찰당국은 “시 거주 17세 소녀가 자신이 걸린 에이즈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염시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100명의 남성들과 성관계를 해왔다”고 이 신문에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 당일까지 이 소녀와 관계를 했던 100명의 남성 중 4명의 신원만 파악된 상태였고, 이들 4명을 대상으로 에이즈 감염여부에 대한 검진을 실시한 결과 1명은 에이즈양성으로 진단됐다. 나머지 3명도 계속 검진을 받았다.
소녀는 자신이 상대했던 나머지 남성들의 신원 공개는 거부했다. 당시 러시아 보건당국은 2006년 현재 러시아 에이즈 환자는 어린이 2284명을 포함해 모두 36만4000명이며, 전년대비 5.2% 늘었다고 발표했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 제주 4ㆍ3 희생자에 국가수반 자격으로 사과
2006년 4월3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현대사 최대 비극적인 사건인 ‘제주 4·3사건’ 제58주기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 희생자 영령들을 모신 위령제단에 분향하고 묵념했다. 헌정사상 국정 책임자가 ‘제주 4·3사건’ 위령제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었다.?앞서 2003년 ‘제주 4·3사건’에 대해 정부 차원의 첫 공식사과가 있었다. 그 해 위령제에는 고건 당시 국무총리가 참석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위령제에서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한다”며 “국가권력은 어떤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돼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15대 김대중 전 대통령과 17대 이명박 대통령은 해마다 거듭된 제주 4·3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1975년 마오쩌둥, 타이완 포로 대사면
1975년 4월3일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이 타이완 군인들에 대한 대사면령을 내렸다. 사면된 군인들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장제스의 지휘 아래 중국 공산당과 내전을 벌이다 전범으로 붙잡힌 국민당 군 간부들로, 20여 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 것이었다. 중국은 이들에게 단체로 중국 여행을 시켜준 뒤 타이완으로 송환했다.
<승자와 패자가 만드는 백가지 전쟁(사무엘W.크럼프턴 저, 2002)>에 따르면, 미 국무장관 마셜(George Marshall, 1880~1959)은 1946년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을 중재하려고 했다. 마오쩌둥은 협상에 긍정적이었으나 장제스는 그렇지 않았다.
마셜과 마지막까지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1947년 미국으로 돌아가자 중국 내전은 다시 점화됐다. 공산당은 1948년 10월 만주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국민당군을 포로로 잡았다. 1948년 12월에는 중국 북부에서 66개의 국민당 사단이 항복했다.
이듬해인 1949년 4월 공산당이 양쯔강 남쪽으로 이동하자 그 해 12월 장제스 추종자들은 타이완으로 대피했다. 마오쩌둥은 그 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장제스는 이듬해인 1950년 중화민국을 수립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