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31일] 달라이 라마 망명정부 세운 날

2008년 쿤밍~방콕 고속도로 개통

2008년 3월31일 당시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와 부아손 부파반 라오스 총리, 사막 순다라웻 타이 총리가 ‘메콩강 유역 6개국 정상회의’가 열린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서 쿤밍~방콕 구간 ‘3번 도로’의 공식 개통을 선언했다. 베이징에서 싱가포르까지 동아시아를 종단하는 육로 통행이 가능해지는 순간이었다.

엄청난 도로건설 비용 대부분은 중국이 냈다. 중국은 ‘남북 고속도로’ 가운데 쿤밍~라오스 국경의 국내구간에 430개의 다리(橋)와 15개의 터널을 짓는 데 총 40억 달러를 투자했다. 라오스 구간의 공사비용도 모두 중국이 부담했다. 라오스와 타이 사이의 교량 건설 비용은 타이 정부와 중국정부가 반씩 냈다. 버마 북부 옛 도로 복구공사에도 돈을 냈다.

중국은 그러나 자본과 노동력, 자재를 모두 자국에서 조달했다. 자국의 성장 및 소득정책을 착실히 수행하면서 동남아시아 진출을 가속화 한 것이다.

1995년 알제리 군, 이슬람 게릴라 수천명 사살

1995년 3월31일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군대가 자국의 이슬람 게릴라 2800여명을 사살하고 200여명을 체포했다. 1991년 시작돼 2002년까지 10년 넘게 지속된 알제리 내전(Algerian Civil War)의 와중에서 빚어진 참극이었다. 1991년 알제리 정부와 여러 이슬람주의 반군 집단 간 무력 충돌이 잇따랐다. 내전 기간 중 15만~20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0명 이상의 알제리 언론인들이 치안 부대 및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암살됐다. 이 갈등은 1991년 이슬람 해방 전선(Islamic Salvation Front), 2002년 알제리 무장 이슬람 조직(Armed Islamic Group of Algeria)이 각각 항복하면서 사실상 알제리 정부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들이 사실상 정부를 장악했다.

알제리 원주민은 베르베르인이고, 7세기 이후 아랍인이 들어왔다. 유럽인은 소수지만 대부분이 프랑스계이고 약간의 이탈리아인, 에스파냐인, 러시아인도 섞여 있다. 주민 가운데 아랍인이 80%, 베르베르인이 19%를 차지한다. 나머지가 유럽계다.

2012년 현재 알제리 종교인의 대다수는 무슬림이다. 프랑스의 축구 선수인 지네딘 지단도 무슬림 출신. 알제리에서 이슬람외의 다른 종교는 사실상 차별과 탄압을 받고 있다. 2008년 개종을 불법으로 규정한 새 법령이 발효되면서 이미 26개의 알제리 개신교 교회가 정부에 의해 폐쇄됐다.

1970년 일본 적군파 여객기 납치

1970년 3월31일 일본 적군파 소속 학생 9명은 나리타공항에서 출발한 후쿠오카 행 일본항공 소속 보잉 727기 ‘요도호’를 후지산 부근에서 납치했다. 이들이 속한 단체의 정식 명칭은 연합적군(聯合赤軍)이며 1969년 2개의 극좌파가 연합한 단체였다.

승무원 7명과 승객 131명이 타고 있었다. 적군파는 기장을 권총으로 위협, 북한 평양으로 갈 것을 명령했다. 기장이 연료부족을 이유로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자 적군파는 노약자 23명을 석방했다.

요도호는 후쿠오카를 출발 북으로 가던 중 다시 남하해 오후 3시경 김포공항에 비상착륙했다. 적군파는 승무원 7명과 승객 99명을 포함한 106명의 인질을 잡고 북한으로 안전 비행할 것을 요구했다.

인질범들은 일본 운수성 차관 야마무라(山寸新治郞)가 인질을 석방하면 대신 인질로 평양으로 동행하겠다는 제안을 수락, 승무원 3인을 제외한 전원을 석방했다. 79시간 만에 야마무라 차관을 인질로 잡고 북한으로 떠났다.

1970년대 적군파는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로드 공항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고 여러 나라에서 대사관을 점거하는 등 주요 테러작전을 잇따라 감행했다.

1959년 달라이라마 인도 망명

1959년 3월31일 티베트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2600㎞의 고단한 역정 끝에 히말라야 산맥의 고지대 다람살라에 도착해 망명정부를 꾸렸다.

티베트 군복을 입고 병사로 위장한 달라이 라마는 수명의 호위를 받으며 야밤에 별궁을 빠져나와 인도로 향했다. 약 1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그를 따라 다람살라로 왔다.

한 달 전인 2월 중국은 달라이 라마를 한 연극에 초대했다. 아무 호위 없이 혼자 중국군 사령부로 오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가 살해될 것으로 직감했다. 군중 수만 명이 달라이 라마가 거처하던 수도 라싸의 별궁을 에워싸고 그를 보호했다. 그들에게 달라이라마는 ‘큰 바다와 같은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달라이라마 자체가 몽골어와 티베트어가 합성된 말로, ‘큰 바다와 같은 영적 지도자’라는 의미다.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달라이 라마는 탈출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라마 불교에서 달라이 라마는 부처의 환생이라고 믿는 존재다. 정신적 지주임은 물론 정치적 권위까지 갖춘 법왕을 의미한다.

1949년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듬해 인민해방군을 동원, 티베트를 강제 점령했다. 이른바 ‘17조 평화조약’을 통해 티베트를 중국 영토로 편입시키고 종교·민족·문화에 대한 말살 정책을 실시했다. 티베트인들의 저항은 10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내는 것으로 끝났다.

다람살라 망명정부는 티베트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고 국제사회는 달라이 라마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20만 티베트인들이 희생한 대가였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외교·군사적 독립 요구를 접고 자치권 확대를 추구하는 ‘중도 노선’을 취하고 있지만 중국의 태도는 완강하다. 56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14억 인구대국 중국의 사회 혼란을 부채질하는 것은 물론 광활한 중국의 국가 통일과 민족 단결을 해치는 불법행위라는 것이다. 티베트 시위대에 관용을 베풀거나 빈틈을 보이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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