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벌’ 박노해 “아프가니스탄 아이의 작은 맨발처럼”
첫 꽃망울이 터지자마자
벌들이 다시 찾아왔다
날카로운 전자파를 뚫고
독한 살충제와 공해를 뚫고
총알이 나는 전쟁터를 달려온
아프가니스탄 아이의 작은 맨발처럼
벌들은 그 작은 날개로
얼마나 멀고 험한 길을 날아왔을까
메마른 아프리카 여인의 품에 안겨
젖을 빠는 아이처럼 벌들은 지금
검은 고목에 갓 피어난 유백색 꽃술에 안겨
마른 젖을 빨며 잉잉거린다
아이 울음소리 나지 않는 마을은
인류의 멸종을 향해 가는 길이듯
벌들이 찾아오지 않는 봄은
불임의 침묵으로 종말을 향해 가는 봄
인공위성이 지구를 돌며 내 위치를 알려줘도
빛의 속도로 도서관이 나에게 날아와도
누가 내 식탁에 밥과 과일을 올려줄까
죽음을 뚫고 다시 찾아온 벌들이 아니라면
저 작은 날개로 꽃가루를 나르는
생명의 배달부가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