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지역간 파벌간 갈등에 가슴 아파하신 도산 안창호 선생님께
[아시아엔=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안녕하십니까. 도산 선생님. 2019년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장관 김부겸 인사드립니다.
제가 맡고 있는 소임은 도산 선생님과 희미할지언정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1919년,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도산 선생님이 초대 내무총장(국무총리 겸직)을 맡으셨고 ‘내무부’는 곧 행정안전부의 전신이기 때문입니다. 외람되이 칭한다면 저는 도산 선생님의 까마득한 후배가 되겠습니다.
역사 속에서 100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니나 보통 사람의 일생을 훌쩍 뛰어넘는 아득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 지난 100년은 되돌아보기가 어지러울 만큼 구절양장(九折羊腸)의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온 나날이었습니다. 나라를 잃었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으며 둘로 갈라져 동족상잔의 비극을 수백만의 희생으로 치렀고 독재와 가난과 싸우며 나라를 일으켜 세워 힘겨움 속에서도 한 발 한 발 전진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겨우 여기까지 밖에 오지 못했는가 하는 탄식과 선생님 이하 선열들이 꿈꾸던 나라를 여직 만들지 못하였다는 송구함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러한 ‘오늘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난 100년의 봉화(烽火)였으며 초석(礎石)이자 효시(嚆矢)였던 선배들의 발자취를 돌아봄은 단순한 과거의 반추가 아니라, 오늘을 넘어 내일로 이어지는 길 찾기의 일환일 터입니다.
경술국치 직전이었던 1910년 4월, 선생님이 망명을 떠나시면서 읊었던 거국가(去國歌)를 새삼 되뇌어 봅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일로부터 여러 해를 /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 동안에 나는 오직 /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설워마라 / 나의 사랑 한반도야
뱃전에 서서 멀어져 가는, 또 실제로 그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조국을 바라보며 눈시울 적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그린 듯 눈에 선합니다.
4절까지 이어지는 <거국가>를 다시 읊으면서 불현듯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 모든 구절구절에 나라 생각하는 마음은 넘쳐 흐르나,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거나, 무엇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통탄하는 대목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진은 선배를 원망하고 우리 민족의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에다 돌리려고 하니 대관절 당신은 왜 못하고 남만 책망하려 하는가?”고 외치시던 선생님이시기 때문일까요. 그 어떤 분노 충만한 출정가보다도, 격정에 찬 투쟁의 노래보다도 <거국가>는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3.1항쟁의 우렁찬 독립만세 소리가 조선을, 나아가 세계를 뒤흔든 이후 임시정부가 구성됐을 때 선생님은 누가 보아도 임시정부 수반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과 역량을 지니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직위를 굳이 마다하고 내무총장을 고수하셨지요. 이는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서 모였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격렬하게 펼쳐졌던 파벌 싸움, 그 중에서도 평안도 출신의 서북파를 각별히 경계하던 기호파 인사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였음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1919년 5월 26일, 그러니까 미국을 떠나 중국 상하이로 들어오신 다음 날, 북경로 예배당에서 선생님이 “나는 여러분의 머리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러 왔습니다.”라고 밝히신 까닭이기도 하겠습니다. 어쩌면 연설의 마지막 순간 선생님은 피 한 움큼 토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동포가 이만큼 피를 흘린 뒤에 저주하고 머뭇거림은 죄악이외다. 다만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여 대한 사람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같이 일할 뿐이올시다. 온 대한 사람이 거꾸러지더라도 나는 홀로 서서 나아가겠다고 맹세하십시오.”
선생님은 그 후 임시정부 내에서, 독립운동진영 내에서 지역간, 파벌간 갈등이 있을 때마다 그를 중재하고 조율하느라 진력하셨습니다.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과 이동휘 국무총리가 대립했을 때,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맞붙어 으르렁거릴 때 선생님은 무던히도 위태로운 중심을 잡으시느라 온 힘을 다 쓰셨지요.
그러나 그런 선생님께마저 엄청난 오해와 거짓이 들씌워지곤 했습니다. 윤치호의 일기에는 여러 차례 선생님에 대해 ‘들었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안창호 씨가 지역감정의 소유자여서, 기호인들의 노력으로 독립을 얻을 것 같으면 차라리 독립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1920년 8월 30일) “서북파의 지도자인 안창호 씨가 이런 말을 했단다. ‘먼저 기호 사람들을 제거하고 난 후에 독립해야 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다.”(1931년 1월 8일) 모두 직접 들은 얘기가 아니라 그랬다 ‘카더라’는 정보인 셈입니다. 저런 중상모략을 당할 때 선생님의 가슴은 어떠하였을지 감히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3.1운동의 만세 소리로부터 100년을 맞은 오늘,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 성큼 나아간 후로 1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오늘의 저희는 100년 전 선생님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변화와 성취를 이루었습니다만, 아직도 이 나라 안에서는 심각한 지역 갈등이 존재하며, 여전히 많은 이들이 왜곡된 편견에 사로잡힌 가해자로, 또 오해와 차별의 피해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 지나치게 비대해져 버린 중앙과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방간의 갈등 또한 심각해지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또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역사를 할퀴고 지나간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문신처럼 간직한 분들의 고통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 김부겸은 100년 전의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를 송두리째 본뜨고 그 깊고도 선명한 발자취를 충실히 따르고자 합니다. 서두르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겠습니다. “오늘에 일하여 이루지 못하면 내일에, 금년에 일하여 이루지 못하면 내년에…… 언제든지 독립을 완성하는 날까지 쉬지 않고 일하자 함이외다.”(l921년 5월 시국강연)라고 하신 것처럼 제 앞에, 우리 국민 앞에 놓인 난맥들의 실마리를 조금이라도 더 풀어 가겠습니다.
가끔 어찌 손을 쓸 수 없다 싶을 정도로 완고한 고집과 관성의 벽 앞에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싶은 막막한 무력감에 부딪칠 때도 있으나 이 나라의 초대 ‘내무’ 책임자이셨던 선생의 말씀을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나는 사람을 가리켜서 개조하는 동물이라 하오. 이에서 우리가 금수와 다른 점이 있소. 만일 누구든지 개조의 사업을 할 수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거나 사람이라도 죽은 사람일 것이오.”(1919년 상하이 연설). 부디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김부겸은?
1958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경북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옥고를 치렀으며, 1987년 6월항쟁 당시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경기도 군포에서 3선 의원을 지낸 후, 대구에서 세 번의 도전 끝에 4선에 성공했다. 문재인정부 출범과 함께 행정안전부장관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