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벡 투어 38] 아랄해와 함께 사라진 고려인 3세의 꿈

최희영 작가가 무이낙 ‘배들의 무덤에서 페선에 올라가 우즈베키스탄 국기를 펼쳐 든 모습. 이 지역까지 찰랑대던 해안선이 200km쯤 북으로 밀려났고, 16m 깊이의 수심을 헤엄치던 철갑상어와 유럽 잉어도 서서히 다른 어족들과 함께 멸종됐다. ⓒ우즈베키스탄에 꽂히다, 최희영

[아시아엔=최희영 <우즈베키스탄에 꽂히다> 작가] 60년 전 아랄해의 평균 수심은 16m였다. 그리고 서해안 쪽의 최고 수심은 69m나 됐다. 세계 4대 규모의 내해(內海)라는 자부심이 빛났던 바다였다. 하지만 50년 만에 이 바다는 1/10 규모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모래사막이 차지했다. 무이낙까지 찰랑대던 해안선은 200km쯤 북으로 밀려났고, 16m 깊이의 수심을 헤엄치던 철갑상어와 유럽 잉어도 서서히 다른 어족들과 함께 멸종됐다.

“이곳 무이낙은 우즈베키스탄 아랄해의 대표적인 항구 도시로 명성이 대단했습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왔고,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어업 종사자로 밤낮없이 북적대던 전형적인 항구도시였지요. 하지만 지금은 오면서 보셨듯이 초라하기 그지없는 시골 마을로 퇴락하고 말았습니다. 저기 멈춰선 어선들과 함께 말입니다.”

쟈혼기르씨는 논문을 쓰면서 60대 후반의 이주노동자 한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한국에서 막노동하던 그는 고려인 3세였다. 카라칼파크스탄 사람이라고 해서 작은 이야기라도 건져볼까 싶었는데 운 좋게도 무이낙 토박이였다고 했다.

아랄해 사막화 현장.<다음 블로그>

1937년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내몰 때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바닷가로 밀려갔다. 함께 내몰린 일행 몇몇은 농사를 시작했다. 아무다리야 하구 땅은 논농사에 적합했다. 우기가 아니어도 물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할아버지는 바다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청년 시절 시베리아 철도 부설에 나갔다가 다리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다.

“밤새 보드카를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평생을 앉은뱅이 신세로 부둣가에서 물고기의 비늘을 다듬던 할아버지의 한을 풀어준다며 아버지가 배를 탔는데 아랄해 거센 파도에 배가 뒤집혀 반송장으로 업혀 왔던 이야기며, 어린 시절 무이낙 바닷가에서 뛰어놀며 이 다음에 장성하면 큰 배를 하나 사서 먼 바다를 마음껏 누비겠다고 다짐했던 이야기며….”

쟈혼기르씨는 그러나 그의 꿈은 이미 10대를 다 채우기도 전에 끝나갔다고 안타까워했다. 점점 멀어지는 해안선과 함께, 이제 뱃일은 끝인가 보다며 탄식하는 어른들의 한숨 소리와 함께, 하나둘 불이 꺼져가는 통조림 공장의 이전 소식과 함께…. 그리고 결국 그의 40대 이후 터전은 누쿠스 장터로, 부하라 노동판으로, 그리고 타슈켄트 염색 공장을 거쳐 한국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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