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특집②] 봉건지배 조선왕조 벗어나 근대 주권국가 지향

고종 임금 장례행렬. 3.1운동은 고종의 인산을 계기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아시아엔=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대한민국이란 국가체제의 기원이 된 3.1운동의 의미는 민족에 대한 자각이다. 민족을 단위로 한 독립된 근대국가를 만들겠다는 민족적 염원의 결집이 3.1운동이다.

근대국가는 봉건왕조체제를 넘어서야 했고, 다른 한편으론 다른 민족국가에 의한 식민지배를 극복해야 했다. 3.1운동은 ‘봉건 극복’과 ‘식민 극복’이라는 두가지 핵심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물론 첫째 전제는 다른 민족과 달리 언어, 종족, 문화 등에서 ‘차이가 분명한 서로 다른 민족’이라는 자각과 스스로(self) 독자적 통치체제를 만들어 가겠다는 자각과 의지(will)의 결집이다.

‘민족의식’이란 무엇보다 ‘동질적(同質的)’ 구성원의 총체를 말하는 것이다. 3.1운동에서의 민족자각은 피지배 민족에 대한 자각과 함께 피지배적 백성(百姓)의 존재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긴 민족이라는 사실이고 그것이 커다란 차이다. 피통치적 굴레 하의 백성을 극복한 동질적 통치주체로서의 민족이 대두된 것이다.

3.1운동은 다른 민족의 굴레를 벗어던지겠다는 민족의 자각과 함께 백성적 존재를 벗어던진 민족 개념을 대중적으로 형성시켰다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 이정표상의 거대한 진전이었다. 왜냐하면 3.1운동 이전까지는 대중적 차원에서 근대적 민족개념도 형성되지 못했지만 일반인은 왕조체제에서의 통치대상적 백성개념의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신분사회에서 각 개인은 그런 체제 속의 신민이자 백성일 뿐, 독립된 지역을 전체로 한 민족개념을 형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명백하게 3.1운동의 독립운동은 왕조를 근간으로 했던 봉건지배구조를 극복하며 나타난 것이다. 조선후기 혹은 구한말의 위정척사(衛正斥邪)나 의병(義兵)운동 등은 봉건체제를 근간으로 한 왕조제 수호와 복귀를 의미했다. 독립운동과는 차이가 분명했다. 한국에서도 근대국가의 건설보다는 왕조체제를 복원하려는 근왕주의(勤王主義)와 복벽주의(復?主義)가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3.1운동을 기점으로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했을 정도로 3.1운동은 근대국가를 향한 분기점이었다.

1919년 1월 22일 고종 사망과 3월 3일 고종 인산(因山)일을 계기로 한 독립만세운동이었지만 고종에 대한 애도가 결코 중심적 사안이 되지 못했다. 대중동원과 투쟁력 강화를 위해 왕의 사망과 왕조제 복귀라는 동원 수단의 계기에 그런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3.1운동이 봉건적 조선사회와 단절하고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3.1운동에서 나타난 반식민주의는 봉건지배적 왕조체제와 절연하고 근대 주권국가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도 봉건왕조 질서를 극복하면서 비로소 근대국가가 만들어졌다. 민족과 지역을 넘어 통치주체는 부르봉왕조나 신성로마제국 등 왕조와 왕조간의 경쟁과 배분이었다. 왕국이든, 공국이든 각각의 봉건영주가 통치하는 지역에 따라 분할된 것이었을 뿐 민족국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교통수단의 발달과 상호교류와 무역의 증진을 통해 다양한 접촉을 통해 왕조를 넘어선 일반 신민과 농노들 간에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지역개념에 따른 민족의 형성으로 나아갔다. 또 신구 종교 갈등을 계기로 17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민족을 기반으로 한 근대주권국가로 나아갔다.

17세기에 가서 유럽도 비로소 민족을 단위로 하는 독립된 민족국가가 만들어졌다. 그 계기는 30년간 계속된 신-구 기독교간의 종교전쟁(1618-1648)을 결론지은 베스트팔렌조약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민족의 근대민족국가의 지향도 다른 신생독립국처럼 이민족(異民族)과의 경쟁과 대립하거나 차별적 지배 경험을 통해 급격한 형성된 것이다. 517년간 계속된 조선왕조라는 봉건시스템을 통한 명과 청에 의한 간접적 조선지배에는 중국에 대한 저항개념이 나타나기 어려웠지만 일본에 의한 직접적 식민통치는 곧 일본과 조선인간의 직접 접촉과 언어와 문화가 다른 민족간의 비교로 나타나고, 그 비교에 따른 차별 혹은 피지배라는 인식은 곧 민족개념을 형성시켰다.

세계변화와 함께 일본지배에 따른 대자(對自)적 인식과 민족차별을 경험하며 형성된 민족의식이기도 했다. 그것은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영국과의 아편전쟁(1842) 패배와 일본과의 청-일전쟁의 굴욕적 대배(1895)를 지켜보며 중화사상과 봉건지배체제는 신해혁명(1911)으로 막을 내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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