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래·등영초 부부의 ‘청빈낙도’ 러브스토리 닮을 정치인 어디 없소?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가장 편안하고 두 다리 쭉 펴고 살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청빈낙도(淸貧樂道)하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세상에 바라는 바가 없다. 오늘 가도 좋고 내일 세상을 떠나도 여한(餘恨)이 없다. 언제나 편하다.
청빈낙도란 청렴결백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고 즐긴다는 뜻이다. 옛날 조선시대는 양반(兩班) 사회였다. 양반은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양반을 사대부(士大夫)라고도 하는데, 이는 사(士)와 대부(大夫)를 통칭한 말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소설 <양반전>에서 “글을 읽는 사람을 선비라 하며, 벼슬길에 나아가면 대부가 된다”고 하였다. ‘선비’란 벼슬을 하지 않고 글을 읽으며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했다.
그 선비를 <순자>(荀子) ‘애공’(哀公)편에 공자(孔子)가 이렇게 정의했다. 공자는 선비의 덕목을 묻는 노나라 애공에게 “선비는 많이 아는 것보다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며, 말과 행동도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할 말을 제대로 하였는지, 옳은 행동을 하였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공자는 선비가 추구해야 할 학문과 삶의 자세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선비 최고의 덕목 중 하나가 바로 청빈낙도라는 얘기다.
오늘날 모든 중국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위대한 인물은 명재상 주은래(周恩來)와 그의 부인 등영초(鄧穎超)라고 한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이 생각나고, 가정이 어려우면 현명한 아내가 필요하다. 아마 중국인에게는 정치인 중 주은래와 그의 부인 등영초가 청빈낙도의 대표적인 위인이었던 것 같다. 모택동과 같이 중국 건국을 위해 일하며 가장 오랫동안 총리 자리를 지킨 인물이 주은래다.
주은래는 프랑스 유학생 출신의 정치가였으나 평생에 단 한 벌의 인민복으로 살았다. 주은래 부인 등영초도 주은래만큼이나 청렴하고 결백한데, 그녀가 죽음에 임박하여 두 차례나 그녀의 유언을 다듬고 손질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등영초도 남편 주은래처럼 깁고 기운 단 한 벌의 의복 밖에는 없었다. 그녀는 임종에 앞서 간호사에게 자신이 죽으며 즐겨 입던 검은 옷으로 수의(壽衣)를 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녀의 단 한 벌의 옷은 헤지고 닳고 닳아서 속을 세 겹이나 기웠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의 바지는 웃옷보다 더 기운자국이 많았다고 한다.
간호사는 그녀의 검은 옷을 수의로 만들기 위하여 마지막 바느질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등 여사의 유언 속에는 그녀의 청렴(淸廉)과 생활신조가 살아생전과 하등 다름없이 담겨 있었다. “나의 인체는 해부용으로 바치겠다. 장례나 추도회는 일체 치르지 말라. 살고 있는 집은 국유이니, 기념관이나 주은래가 살던 집이라고 보존하지 말라.”
여성정치가요 주은래 총리의 부인이었던 등 여사는 1992년 7월11일 일생을 마쳤다. 등영초도 주은래만큼이나 사회적으로 열성적이었다. 주은래와 등 여사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주위사람들은 주은래에게 씨받이 자식을 갖자고 하며, 총리가 자식이 없으면 되겠느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은래는 그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주은래는 “고아를 기르면 되지 않는가?”라고 하면서 모두가 인민의 자식이라고 하였다. 바로 전 이붕(李?) 총리가 그렇게 해서 기른 양아들이라고 한다. 이붕 총리는 주은래의 혁명동지 아들이다. 먼저 간 혁명동지의 아들을 양아들로 맞아들인 주은래의 사상은 정치가의 청빈낙도를 나타낸 최고의 덕목이 아니었을까?
이와 같이 청빈낙도는 ‘가난함 속에서도 마음 편하게 생활하며 도를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평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정신적 가치의 상징일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나물 먹고 물 마기며 팔을 베고 누웠어도 즐거움이 그 속에 있으니, 의롭지 못한 부(富)와 귀(貴)는 나에게 있어서는 뜬구름과 같다”고 하였다.
공자는 제자를 받아들일 때 신분이나 빈부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은 신분이 높은 이, 낮은 이, 부자도, 가난한 제자도 있었다. 그들 중 원헌(原憲)이란 제자가 있었는데 원헌은 가난했지만 청정(淸淨)하게 절개를 지키며 청빈낙도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풀로 엮은 지붕, 쑥대로 만든 문, 뽕나무 가지로 만든 문기둥은 비가 오면 지붕에선 물이 새고 아래로 습기가 찼지만 원헌은 단정하게 그 가운데 앉아 예악(禮樂)과 교화(敎化)를 닦으며 도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자공(子貢)이 원헌을 방문했다. 당시 큰 부자였던 자공은 멋진 말이 끄는 거대한 마차를 타고 순백의 화려한 의상을 입고 원헌을 찾아왔다.
원헌이 사는 곳은 골목이 좁아 자공의 큰 마차가 지나갈 수 없었다. 자공은 어쩔 수 없이 마차에서 내려 걸어서 원헌의 집을 찾았다. 이때 원헌이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모자를 쓰고 손에는 지팡이를 짚은 채 그를 맞았다. 가난하고 병들어 보이는 원헌의 모습을 본 자공이 물었다.
“아! 선생께선 병이 나신 것입니까?” 원헌이 대답했다. “내 들으니 돈과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하다 하고, 도를 배웠음에도 힘써 행하지 않는 것을 병들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가난하긴 하지만 병이 든 것은 아닙니다.” 자공은 이 말을 들은 후 몹시 부끄럽게 여겼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청빈낙도라 하여 조금 부족하고 가난해도 그 속에서 평안을 찾고 도(道)의 정신세계에서 위안을 찾았다. 그런데 요즘 정치인들은 권력과 축재에 기를 쓰다가 줄줄이 교도소의 담장 안에서 탐관오리의 불명예를 곱씹고 있는 중이다. 조금 덜 먹고 덜 입더라도 청빈낙도하며 두 다리 쭉 뻗고 살아감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