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일본경찰의 뿌리···도쿠가와 장기집권에서 메이지이신으로

일본경찰청 전경.

[아시아엔=김중겸 치안발전포럼 이사장, 전 경찰청 수사국장]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는 일본열도를 통일해 호령하다 그만 병들고 말았다. 제2인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불렀다.

“내 뒤 잇는 이 어린 아들 잘 보살펴 주시게.”
“그럼요. 걱정 마십시오.”

속 알 수 없는 그 무덤덤한 표정 살피며 겨우 눈 감았다.
이에야스 신하들 “그깟 어린애에게 일본을 맡겨선 안 됩니다. 뺏어야 합니다.”

귀 간지럽게 진언한다. “그렇지. 이제 내 차례야. 암. 그렇고 말고.”

1603년. 결국, 전쟁 일으켜 히데요시 아들과 옹호세력을 죽였다. 피로 빼앗은 권력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권 에도막부(江戶幕府)가 들어섰다.

1867년. 도쿠가와 한 집안의 장기집권 264년. 메이지이신(明治維新)으로 무너졌다.

메이지정부의 권력기관 나눠 갖기

1868년 메이지이신. 정치 중심지 에도, 수도 도쿄 사람들의 반란이 아니었다. 薩長土肥(삿조도히)가 주역. 薩摩(사쓰마, 지금의 규슈 가고시마), 長州(조슈, 혼슈 야마구치), 土佐(도사, 시코쿠 고치), 肥前(히젠, 규슈 사가). 네 지방의 시골 하급 무사들이다.

혁명 성공의 보장 수단으로 국가의 무력을 균점했다. 사쓰마는 경찰과 육군, 조슈는 육군, 도사와 히젠은 해군이 각각 차지했다.

해군은 시간이 흐르면서 문호개방과 실력주의가 정착했다. 제독 되는 데 지역차별이 없었다. 육군은 달랐다. 조슈 독무대로 변했다. 그들만이 장군이 됐다. 밀린 장교들이 뭉쳤다.

참모본부를 장악, 별을 달았다. 권력을 독점해 이를 유지하려고 전쟁 구실을 냈다. 바로 중국 및 진주만 공격이다. 마침내 전범이 됐다.

나졸(邏卒)에서 순사(巡査)로

치안유지는 어땠는가. 혁명세력으로부터 군인을 파견받아 경찰 일을 수행하는 실정이었다. 급하게 나졸 3천명을 뽑았다.

다른 지역 사람은 믿을 수 없었다. 메이지 정부를 전복시키는 반역행위를 할 우려가 있다고 봤다. 薩摩(가고시마) 사람만 선발했다.

나졸총장(邏卒總長)에 가와지 도시요시(川路利良)가 임명됐다. 당연히 사쓰마(薩摩) 출신이었다.

도시요시는 유럽경찰을 시찰 후 귀국해 프랑스식 중앙집권적 국가경찰제도를 건의했다. 1874년 1월 15일, 도쿄경시청이 출범했다. 초대 대경시(大警視, 현재의 경시총감)에 임명됐다. 근대 일본경찰의 아버지가 됐다. 당시 순사 정원은 6천명.

순사도 사쓰마 사람으로 충원했다. 큰 길 교차로에서 [交]代로 當[番]을 섰다. 고반(交番)의 기원이다.

경찰청-경찰본부-경찰서-고방&파출소&주재소

중앙정부 경찰기관은 국가공안위원회-경찰청이다. 위원장은 국회의원으로서 내각의 대신(大臣). 경찰청의 장은 장관이라 부른다. 차관급이다.

광역자치단체는 都 1(도쿄 東京)+道 1(홋카이도 北海道)+府 2(교토 京都와 오사카 大阪)+縣 43으로 모두 47개 경찰본부(도쿄는 경시청)가 있다.

경시청과 경찰본부 밑에는 경찰서가 있다. 관할인구 20만을 기준으로 경찰서를 신설한다. 인구 1586만명의 도쿄에는 경찰서가 102개 있다.

경찰서 밑에는 고방(交番 koban), 파출소, 주재소(駐在所)가 있다. koban은 우리나라의 파출소와 같다. 옥스퍼드 영어사전 등에 등재되어 있다.

파출소 역할은 고방과 같다. 고방과 파출소 직원은 우리나라처럼 그곳에 발령 내서 근무케 하지 않는다. 경찰서에서 매일 아침 교육 후 배치한다.

주재소는 시골에 있다. 부부 경찰관, 경찰관과 아내 또는 경찰관과 남편이 함께 살며 근무한다. 경찰관 아닌 배우자에게는 수당이 지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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