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제주 유배’ 덕분에 천수를 누렸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인생에는 길흉화복이 있다. 좋은 일과 나쁜 일, 행복한 일과 불행한 일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돌고 돈다. 지금도 우주는 끊임없이 한쪽에선 생겨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며, 또 한쪽에서는 무너지기도 하고, 아주 없어져 텅 비기도 한다.
이 성주괴공의 진리에 따라 지구는 ‘춘하추동(春夏秋冬)’으로 돌고, 만물은 ‘생주이멸(生住離滅)’로,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로, 그리고 인생은 ‘길흉화복’으로 돌고 돈다. 또한 ‘유심론(唯心論, Spiritualism)’은 만물의 궁극적인 근원은 마음 또는 정신이며,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심적(心的) 또는 정신적 현상만이 아닌 물질을 포함한 모든 현상이 그 근원에 있어서는 마음의 발현이라고 보는 견해다.
유심론은 세계의 참 실재는 궁극에 있어서는 심적인 것이며, 실재하는 존재보다도 정신이 보다 근원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유심론의 대표적인 말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이 인간의 마음이 들어서 짓는다는 것이다. 곧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흥망성쇠(興亡盛衰)·희로애락(喜怒哀樂) 등이 다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요 인간의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 기본적인 의미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바뀐다고 한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만나면 기운이 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기(氣)가 빨리는 듯 피곤해지고 불편한 사람도 있다. 또 이유 없이 꼬이고 어긋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호흡이 척척 맞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 귀한 운명과 천한 운명을 결정하는지 알아보자. 인간은 서로서로 어울려 살기 때문에 인간(人間)이다. 그래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이 곧 인간관계의 연속이다. 조선시대 허준(許浚, 1539∼1615)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의술로 환자를 잘 치료했다. 그 중 하나, 신혼의 신랑·신부를 살려낸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하루는 허준이 혜민서(惠民署)에서 오전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데 장정들이 달려와 정승 집으로 모셔갔다. 늙은 정승이 뛰어 나와 무남독녀인 딸이 어제 혼인을 했는데, 멀쩡하게 첫날밤을 치르고 아침에 꼼짝도 않으니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허준이 진맥을 해보니 손목의 맥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허준은 주위를 둘러보다 집 안에서 가장 오래된 측간에 가 항아리에 인분을 가득 퍼담았다. 그리고 신방으로 돌아와 방문을 열고 똥물을 퍼부었다. 잠시 후 신랑 신부가 코를 막고 밖으로 뛰쳐나와 모두 깜짝 놀랐다. 정승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무엇 때문에 죽은 두 사람이 살아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허준은 방 안쪽에 걸어 두었던 사향(麝香) 때문이라고 했다. 사향의 냄새는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최음(催淫)작용이 있지만, 너무 많은 사향을 걸어 놔 중독돼 죽음 직전에 이르렀던 것이다. 좋은 향기의 독을 지독한 냄새의 인분으로 해독하니, 그야말로 허준의 의술이 아니면 갈 데 없이 신혼부부는 죽은 목숨이었던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광해군은 왕권을 잡는 과정에서 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패륜 행위를 일삼아 서인(西人)이 들고 일어나 왕의 조카인 능양군을 옹립하니, 이것이 인조반정이다. 광해군은 인조의 온정으로 목숨은 부지하여, 강화도로 귀향갔다. 그리고 이어 유배지인 제주도로 쫓겨났다. 제주도 유배 시에는 감시하는 별장이 안방을 차지하고, 자신은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 내색도 앉은 채 불평 없이 지냈다.
광해는 인조 19년(1641년) 7월 1일 19년간의 귀양살이 끝에 “내가 죽으면 어머니 발치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광해군이 물러난 지 5년 후 조선은 후금(後金)의 침략을 받았다.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쳤지만 결국 후금에 항복의 예를 행한 뒤 군신관계를 맺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이른바 정묘호란이다.
광해군은 제주 섬에 갇혀 특별히 아팠던 기록 없이 67세의 천수를 누리면서 그 사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같은 끔찍한 일들을 안 겪었으니 개인적으로는 불행 중 다행이 아닌가? 인생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잘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먼저 가느냐 나중에 가느냐의 차이이지 결국은 다 똑같다. 단지 보는 관점에 따라 ‘길’과 ‘흉’이 다를 뿐이다.
이 말은 “인생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좋은 마음을 먹는 ‘노년의 덕(德)’을 습득해야 한다. 이른바 곱게 늙느냐 아니냐는 당사자인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 ‘노년의 덕’에 대해 알아본다.
첫째, 받아들이기다. 받아들이기는 과거(過去)와 화해(和解)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계(限界)를 받아들이고, 고독(孤獨)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둘째, 놓아버리기다. 놓아버리기는 재물에 집착을 버리는 것아다. 그리고 건강에 매달리지 않고, 관계에 느긋해지며, 성(性)에서 자유(自由)로와 지고, 재색명리(財色名利)에 초연(超然)하는 것이다.
셋째, 자신을 넘어서기다. 자신을 넘어서기는 자기 경계(境界)를 넘어서는 것이다. 나보다 큰 어떤 것에 마음을 여는 것, 그것은 신앙과 수행에 힘을 써 공덕을 쌓으므로 해서 내생을 준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