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6일] 베트남 틱낫한 스님 방한, 평화 합장

2008년 中 후 주석 취임 5주년에 티베트 유혈사태

<사진 출처=뉴욕타임즈>

2008년 3월16일 오전 티베트 북동쪽 약 1000㎞ 떨어진 쓰촨성 엉아와의 티베트 주민 거주지에서 벌어진 티베트 독립 요구 시위에 중국 경찰이 발포,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방화 등 시위대의 폭력시위가 시작된 3월15일은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취임한 2003년으로부터 꼭 5주년 되는 날이었다.

중국 정부가 발표 기준 공식 사망자 수는 13명(이튿날인 3월17일 현재), 인도 소재 티베트 망명정부 발표 기준 8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인도의 티베트 인권민주주의센터는 13명, 서구 외신들은 30여명이라고 발표했다.

6일 전 티베트 승려들의 시위가 발단이 됐다. 1959년 티베트 독립운동 49주년이 되는 2008년 3월10일 티베트 수도승 등 600여 명이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를 시작해 3월15일부터 유혈사태 조짐을 보였고, 이튿날인 16일 라사 도심 라모기아 사원 인근에서 몇 명의 티베트 반정부 시위대가 중국 공안(경찰)과 충돌, 사상자가 생긴 것.

시위대는 도로 건물과 경찰 차량, 정부 청사에 돌을 던지며 불을 질렀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행인들도 공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급기야 3월15일 밤, 중국 인민해방군이 탱크와 장갑차로 라사 시내에 진입했고, 중국 공안은 2000여명의 진압 병력을 투입, 최루탄을 쏘며 강제 해산하면서 60여명을 연행했다.

중국은 그 해 8월8일 베이징 올림픽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티베트에서 벌어진 파상적인 폭력시위는 큰 위협이었고 ‘인민 전쟁’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티베트가 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는 인도와의 관계에서 전략적 요충지인 데다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더욱이 티베트의 저항이 다른 59개 소수민족을 자극할 것도 큰 우려였다.

이런 이유로 한편으로는 티베트 역사를 중국 역사 속에 편입시키는 ‘서북공정’과 한족을 티베트로 이주시키는 대규모 ‘식민정책’을 병행하되 수차례 봉기에는 단호한 무력 진압으로 일관해 온 것으로 풀이됐다. 1989년 봉기 때는 당시 티베트자치구 서기였던 후진타오가 무력진압을 진두지휘했다.

2007년 위안부 과오?인정했다가 다시 발뺌한 일본

2007년 3월16일 일본 정부 각료회의는 “관헌에 의한 (옛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연행을 직접 나타내는 듯한 기술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공식 결정, 국제사회의 강력한 반발을 자초했다. 당사국인 한국과 네덜란드, 미국은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을 소리 높여 성토했다.

토머스 시퍼 주일 미국대사는 일본 각료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곧바로 기자들과 만나 “그들(위안부)이 강제로 매춘 당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옛 일본군의 강제연행 사실을 인정한 1993년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 담화를 수정하려는 일본 안의 움직임을 두고 “일본 정부는 그 담화에서 후퇴하지 말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 4월 말로 예정된 아베 신조 총리의 미국 방문과 관련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총리의 방미가 엉망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경고했다.

얀 페터 발케넨데 네덜란드 총리는 이날 주례 언론브리핑에서 ‘불쾌하고 놀라운 일’이라면서, 외무장관이 일본 대사를 불러 일본 정부의 견해를 설명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인도네시아에 살던 네덜란드 여성 일부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바 있는 네덜란드 정부는 1994년 일본군 조사보고서를 발표해, 8곳에 걸쳐 일본 관헌의 폭력적인 연행을 지적한 바 있다.

한국의 외교통상부는 하루 지난 17일 성명을 냈다. 일본 정부의 결정은 역사적 사실을 호도하려는 것으로, 매우 유감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자민당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모임’의 나카야마 야스히데 위안부 문제 소위원장은 이틀 뒤인 18일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공창제도의 안에서 업자에 위탁하는 형태로 위안부를 모집, 군대 안에 위안소를 설치했지만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고 말했다.

2003년 평화운동가 틱낫한 스님 방한

2003년 3월16일 베트남 출신의 한 스님이 “평화를 실천하기 위해서 왔다”면서 한국을 방문했다. 시인이자 평화운동가, 불교계 지도자 틱낫한 스님이었다.

그는 500시간 한국에 머물며 ‘명상 완보(緩步)’로 전국을 돌며 고통 받고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대구에서는 지하철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천도재에 참석했고, 광주에서는 민주화의 성지 5·18묘역을 참배했다. 방한 중 이라크전 발발 소식을 접한 그는 그날 밤 숙소인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깊은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한반도 분단과 반전·평화 운동에 유독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북한이 굶주린 상황에서도 핵개발에 많은 군비를 들이고 있다면,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라며 “남과 북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우리는 형제라는 씨앗이 깃들어 있으니 그 씨앗에 물을 주면 평화가 시작되고 꽃을 피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명찰과 고승들도 찾았다. 백양사와 송광사·범어사·실상사를 잇달아 방문한 그는 “여러 전생 가운데 한 번쯤은 한국에서 승려였던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불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 ‘참여불교의 주창자’, ‘인류의 영적스승’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베트남전쟁 때는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했고 전쟁 난민을 돕기 위한 사회청년봉사학교도 운영했다. 베트남전쟁 후 프랑스로 들어오는 보트피플을 위해 수용소를 세워 봉사활동을 했고 1975년 파리 근교에 ‘스위트 포테이토’를, 1982년 보르도에 ‘플럼 빌리지’를 각각 세우고 명상공동체 활동을 통해 세계 각국의 비구·비구니들과 평화 및 참여불교 운동을 전개했다. 1990년에는 미국 버몬트주에 승원 ‘단풍림’과 수행원 ‘그린 마운틴’을 설립했고 이후 프랑스,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을 오가며 강연 및 저술 활동을 계속했다.

1994년 한국, 생수 시판 허용

1994년 3월16일은 산 좋고 물 좋은 한국이 마시는 물을 돈 주고 사먹게 된 첫 날이다. 한국 헌법재판소는 “생수 판매 금지 조처는 깨끗한 물을 마실 권리(행복추구권)를 침해한다”고 결정, 이날부터 생수 시판이 허용됐다.

한국의 생수 개발역사는 1975년 9월, 생수를 공식 판매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부터였다. 당시 정부는 올림픽 기간 중 외국 선수들이 국내 수돗물의 안전성에 의심을 보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생수 판매를 허용했다가, 올림픽이 끝난 뒤 근거 법률을 폐지했다.

한국 정부는 생수 시판이 자칫 ‘수돗물 정책의 포기’로 비춰질 것을 우려했고, 부자들만 좋은 물을 사먹고 가난뱅이들은 수돗물을 식수로 활용, 계층간 위화감도 걱정됐다. 지하수 고갈과 환경오염 문제도 생수 판매 금지 명분이 됐다.

그러나 한국의 생수업자들은 생수 판매 허용을 요구하며 줄기차게 소송을 제기, 헌법재판소가 금지법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듬 해 ‘먹는 물 관리법’을 제정, 실질적인 생수 시판이 시작되었다.

1968년 미군, 베트남 미라이 마을 주민 500여명 학살

1968년 3월16일 남베트남 손미촌(村) 미라이 마을에서 미군이 무고한 주민 500명(조선일보 추정)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위키피디아는 최소 347명, 최고 504명으로 사망자 수를 추정했다.

미군은 이날 아침 헬리콥터로 남베트남해방전선 게릴라들을 색출할 목적으로 손미촌에 착륙했다. 마을에는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들만이 아침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주민들을 마을 광장에 모이게 해 총격을 가해 주민 수 백명을 학살했다.

이 사건은 당초 군비밀로 베일에 가려 있었지만 1969년 3월 귀환병이 한 의원에게 편지를 보내 조사를 요청하면서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몇몇 희생자는 성폭행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시체 중 일부는 절단된 채 발견됐다고 전해진다. 미군 26명이 학살에 가담했지만, 입대 4개월 2주밖에 되지 않은 윌리엄 켈리 1명만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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