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벡 미르지요예프 대통령④] 고향 ‘지작’의 큰별 라시도프한테 ‘문학적 인본주의’ 물려받아
[아시아엔=조철현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저자] 한국과 마찬가지로 우즈베키스탄 역시 구소련 시절 정치적 텃밭 싸움이 대단했다. 한국이 영호남으로 갈렸다면, 우즈베키스탄의 양대 축은 타슈켄트 계와 사마르칸트 계파였다. 이들의 오랜 파벌 싸움은 1959년 ‘샤로프 라시도프(Sharof Rashidov) 시대’를 맞으며 사마르칸트 계파의 승리로 정리됐다.
라시도프는 1959년 3월 소비에트연방의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올라 1983년 10월까지 24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70년 가량 이어진 구소련 시절의 우즈베키스탄 서기장은 14명이었다. 라시도프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평균 임기는 5년 내외였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재임 기간은 무척 특별했고, ‘공산당 당원증을 가진 중앙아시아의 칸’이라는 별칭까지 붙었을 만큼 그의 영향력 또한 대단했다.
라시도프의 장기집권으로 타슈켄트 계파는 위축됐다. 그리고 그 영향력 아래 ‘카리모프 시대’가 도래했다. 그 역시 사마르칸트 계파였다. 그의 25년 집권 시절 타슈켄트 계파는 완전 궤멸됐다. 따라서 그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른 미르지요예프(Shavkat Mirziyoyev) 대통령은 특별한 정적 없이 안정적인 시대를 열며 오직 국가경제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공교롭게도 그에게 안정적 유산을 남겨 준 라시도프의 고향 또한 지작주다. 우즈베키스탄은 1개의 특별시와 12개의 주, 그리고 1개의 자치공화국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 이 나라의 최고 국정지도자를 두사람 배출한 주는 지작주 한 곳 뿐이다. 그 한 사람이 라시도프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미르지요예프이다.
최고지도자 2명 배출한 지작 주민들 자부심 대단
라시도프는 1983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기 7년 전 일로 1964년부터 서기장을 맡아 왔던 브레즈네프 시대를 마감하고, 안드로포프 시대를 열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의 자살 이유는 분분했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은 1991년 독립 이후 그의 자살 이유가 소비에트연방 정권의 정치적 탄압 때문이었다는 논리로 그에 대한 추모 열기를 키워갔다. 2017년은 그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국정 1년차를 맞고 있던 미르지요예프는 고향 마을 지작에 그의 대형 동상을 세우며 그의 추모 열기를 더욱 부추겼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동상 제막식에 참석해 “라시도프는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항상 높은 ‘인본주의적 사상’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에 헌신해왔다”고 역설했다.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 본 지작 주민들은 큰 자부심 속에서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을 만들어낸 것은 라시도프였다고 환호했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1957년생이다. 라시도프가 구소련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서기장으로 있었던 시절이 1959년부터 1983년까지다. 따라서 그의 유년기 시절과 청년기 시절이 통째로 라시도프 시대와 맞물린다. 지작을 여행하며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을 키운 건 8할이 라시도프였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최희영 <우즈베키스탄에 꽂히다> 작가)
라시도프는 작가와 저널리스트로도 명성을 날렸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그의 동상 제막식 기념연설을 통해 “라시도프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며 문학에도 충실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며 “그의 문학적 족적이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추모했다.
그의 문학 역시 청년기 미르지요예프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가 동상제막식 연설에서 강조했던 ‘라시도프의 인본주의적 정신’은 그런 점에서 미르지요예프 시대를 바라보는 또 다른 포인트다. 마침 그의 취임 첫 연설문에도 그런 단어들이 유독 많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