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온도탑’ 온도 쑥쑥 올릴 방법 없을까?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세모(歲暮)의 거리 높이 솟은 ‘사랑의 온도탑’에 경기가 안 좋아서인지 예년보다 온도가 잘 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구세군 종소리도 영 썰렁하게 들리는 느낌이다. 그 중에도 다행인지 며칠 전에 그 ‘사랑의 온도탑’ 옆의 ‘헌공함(獻供函)’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 봉투에 500만원 거금을 넣고 사라진 분이 있다.
국어사전에서 ‘정(情)’이란 무엇인가 하고 찾아보았다. ①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②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쓰여 있다. 정이란 ‘남을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안다’ 그리고 ‘남을 아낄 줄 안다’는 뜻일 거다. 정이 들었다는 뜻은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 또는 ‘정이 생기어 깊어졌다’는 뜻이다.
‘정 가름’이라는 말이 있다. 옛날 시골에 혼사나 상사(喪事)가 있으면 마을 사람들은 서로 일을 도와줬다. 대사(大事)가 끝나 그 대가로 곡식을 퍼주는 것이 ‘정 가름’인데, 대개 “뭘~” 하며 한사코 받지 않으려고 한다.
‘정 가름’이란 ‘정을 나눈다’는 관행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양하게 발달한 정서다. 보릿고개에 양식이 떨어지면 동네 여인들은 무리 지어 산나물을 뜯어 잘 사는 집을 찾아간다. 뒤뜰에 멍석을 펴고 산나물을 널어놓으면, 그 집 마님은 한 솥에 밥을 지어 먹이고, 돌아갈 때 곡식 한 됫박씩 퍼준다. 이렇게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정 가름’이다.
‘복 돼지사돈’이라는 ‘정 가름’도 있다. 좀 사는 집에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의 수복(壽福)을 비는 뜻에서 3, 5, 7, 9 홀수로 돼지새끼를 사서 이웃에 나누어준다. 이 복 돼지가 자라 새끼를 낳으면 그중 한 마리를 돌려받는 조건이다. 그렇게 돌아온 새끼를 다시 퍼뜨려 나간다. 이렇게 온 고을에 퍼뜨려 한 조상어미 젖을 먹고 자란 돼지사돈끼리 정을 나누는 것이다.
‘석 덤 가름’이라는 것도 있다. 여유가 있는 집 마님은 끼니마다 뒤주에서 쌀을 낼 때 식구 먹을 양식만 내는 것이 아니라 세 몫을 더 내 밥을 짓게 한다. ‘셋을 더한다’ 하여 ‘석 덤’이라고 한다. 이렇게 지은 ‘잉여의 밥’은, 그 마을에 못 먹고사는 사람들을 위한 몫이다. 뒤뜰 울타리의 개구멍을 통해 이 정이 갈라져 나간다. 그래서 이런 개구멍을 남도에서는 ‘정 구멍’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한솥밥, 한 어미젖의 나눔인 ‘정 가름’ 사이에는 그를 변제할 의무가 없다. 다만 큰일이 있거나 품이 필요할 때 너나 할 것 없이 노력을 제공하면 되는 것이다. 일제 때 농촌 생활실태를 조사해 놓은 것을 보면 살림살이가 넉넉해 제 식구 먹고 살 수 있는 가구는 겨우 30%였다. 70%는 먹고 살 아무런 대책이 없는데도 조금도 불안해하거나 각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바로 이 ‘정 가름’ 덕분이었다.
나눔은 가난한 이와 부자 모두를 위해서 필요하다. 부를 나누면 기쁨과 보람을 얻는다. 소중한 것을 버리면 소중한 것을 얻고, 쓸모없는 것을 버릴 때 쓸모 있는 것이 더 채워지는 법이다.
한국인이라면 별 오해 없이 인식되고 통용되는 ‘정’은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첫째, 정은 온후(溫厚)하다. 쉬운 말로 풀면 ‘따뜻하고 도탑다’라는 말이다. 따뜻한 것은 온기, 도타운 것은 정감을 말한다. 바로 이런 감정 때문에 정은 ‘사랑’과 구분된다. 사랑은 따뜻하기보다는 뜨겁다.
둘째, 정은 은근하다. 마치 정은 잔잔한 호수와 같다. 정적(靜的)이다. 반면 사랑은 바다를 닮았다. 동적(動的)이다. 올 때는 거대한 파도처럼 순식간에 밀려오다가도 한번 그 열기가 식으면 썰물처럼 삽시간에 빠져버린다. 정은 두려움이 없다. 은근한 것이 정이기 때문이다.
셋째, 정은 타산적이지 않다. 무언가를 전제하고 또 무언가를 기대해서라면 그건 정을 나눈다기보다는 교제(交際)를 하는 것이다. 사랑은 주어서도 기쁘지만 받아야 더욱 기쁘다. 이렇게 사랑은 상대적이다. 적절히 타산적이면서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는 것이 사랑이다. 반면에 정은 주어서 즐겁고, 받아서 기쁜 것이다.
넷째, 정은 항시적(恒時的)이다. 한번 생겨난 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은 붙이기도, 떼기도 어렵다고 한다. 정이란 마치 평소에 먹는 세끼 밥과 같다. 그러나 사랑은 죽고 못 살 정도로 뜨거웠던 사이라도 한 순간에 돌아서서 남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정은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사랑은 꼭 붙잡고 있지 않으면 날아가 버린다. 그래서 사랑보다는 정으로 맺어진 사이가 깨어지면 더 아프다.
다섯째, 정은 서로 주고받는 쌍방향성이다. 세상에 ‘짝사랑’은 있어도 ‘짝 정’이란 없다. 정이 저절로 주어지는 측면이 강하다면, 사랑은 의도적이다. 사랑은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때가 있다. 그러나 정은 쌍방향성이라 오고 가고 나눔이 정인 것이다.
이렇게 정에 살고, 정에 울며, 정을 노래하는 것이 우리네 정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