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인의 입담꾼이 이끌어가는 스탠드업 코미디 ‘스테이지 6’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매거진 N>은 지난 7월 스페셜 리포트로 ‘아시아의 코미디’를 다뤘다. 필자도 이를 계기로 코미디시장을 나름 깊이 있게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한국의 코미디시장이 방송국에만 주로 의존하면서 방송국에 진입하지 못한 코디미는 거의 사라져가고, 그나마 방송국에 들어간 코미디도 방송국의 제도적인 틀 속에서 자율성을 잃고 있다. 이에 따라 코미디언들은 가장 중요한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방송국 코미디 프로 가운데 가장 먼저 문을 닫은 것은 ‘웃찾사’였다.
오랜 동안 SBS의 간판 개그 프로인 ‘웃찾사’ 폐지 소식은 이후 한국의 코미디시장에 악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던가? 한국 코미디언들은 이같은 위기 속에서 다양한 해결방안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한 통로가 스탠드업 코미디다. 2017년 여름 코미디언 유병재이 코미디 공연을 하면서 ‘스탠드업 코미디’란 말을 꺼냈다. 한국 코미디시장에서 거의 20년 만에 다시 들린 두 단어였다. 주류의 한국 코미디 장르와 달리 스탠드업 코미디는 “분장이나 몸 개그 없이, 오직 말로써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코미디의 한 장르다.
필자도 <매거진 N> 편집장이라는 막중하고도 매우 바쁜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스탠드업 코미디를 연출·연기하는 알파고 시나씨 기자한테서 수차례 이색적인 이 코미디 장르에 대해 여러 차례 들을 기회가 있었다. 마침내 지난 9월에 이어 11월 하순 두 번에 걸쳐 강남 신논현역 인근 ‘코미디헤이븐’을 찾았다. 공연장인 코미디헤이븐은 어떻게 보면 테이블 15개 정도 놓여있는 조그마한 술집이다. 공연 입장료 1만원은 다분히 상징적이고, 손님들이 맥주나 양주 등을 마시고 안주를 먹으면서 무대에서 펼쳐지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관람하는 구조다. 미국의 코미디 클럽문화를 그대로 본뜬 것이라고 한다.
필자가 코미디헤이븐을 찾아간 것은 두 가지에서다. 하나는 한국에서 오직 스탠드업 코미디만으로 운영되는 장소는 이곳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알파고 기자도 그곳에서 매주 목요일 오후 8시에 ‘스테이지 6’ 공연을 하고 있다. 공연 이름이 ‘스테이지 6’인 것은 코미디언 6명이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통해 관객에게 재미와 함께 생각한 꺼리를 던져주고 싶다고 한다. 알파고 기자는 “스탠드업 코미디는 셋업과 펀치라인으로 구성된다”며 “일단 양념으로 관객이 웃을 준비를 하게 만든 뒤 그 후 본격적으로 빵 터지는 한두 마디로 관객의 웃음보를 터지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했다. 알파고 기자는 “이같은 기본원리에 따라 스탠드업 코미디는 ‘One Liner’ 계열과 ‘스토리텔링’ 계열로 나뉜다”고 덧붙였다.
필자가 ‘스테이지 6’를 관람하던 바로 그날 첫 무대에 나선 코미디언 손동훈은 ‘원 라이너’로 공연했다. ‘원 라이너’는 말 한마디로 셋업을 깔고, 다음 한 문장으로 펀치를 매기는 기법이다. 그러다 보니 손동훈의 공연은 두 문장으로 구성된, 상호 연관성이 없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한마디로 ‘스토리 짬뽕’이지만, 다 듣고 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온다. 손동훈의 코미디 대본도 ‘사이코패스 캐릭터’로 설정되다 보니, 청중들의 호불호가 확실히 갈린다.
다음 순서는 송하빈이 맡았다. 6명의 출연진 중에서 가장 담백하고 순수한 스토리를 풀어갔다. 애초 ‘스테이지 6’ 공연이 ‘19금’인데, 송하빈의 개그는 ‘19금 범주’를 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185cm에 이르는 큰키에서 나오는 우스꽝스러움을 최대한 활용하는 모습이었다. 호주머니 사정이 안 좋은 송하빈은 ‘셀프 디스’를 위주로 하는 ‘스토리 텔링’이 맘에 들었다.
김동하가 송하빈의 뒤를 이었다. 전직 국어교사답게 언어구성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빠져들게 하는 재주가 있다. 필자도 그의 이야기에 몰입하느라 딴데 정신 팔 겨를이 없었다. 6명 중 가장 ‘한국화’(韓國化)가 된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 무대에 선 김병모 역시 ‘원 라이너’다. 그는 손하빈과 달리 ‘원 라인 코미디’를 캐릭터 대신 자신이 꾸준히 갈고 닦은 것으로 보이는 해박한 지식으로 풀어냈다. 그러다 보니, 일반상식이나 지식이 모자란 청중들은 그의 대사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났다. 그런 까닭인지, 김병모의 개그때는 옆사람에게 속삭이며 뭔가 물어보는 듯한 모습이 눈에 종종 띠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공연이 뭔가 생각할 꺼리를 주고 거기다가 웃게까지 만드니 참 좋았다고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5번째 무대에 선 코미디언은 바로 우리의 호프이자 편집장 알파고 시나씨 기자였다. 그는 외국인으로서 한국에 살면서 겪은 일들을 적절한 단어와 표정으로 풀어갔다. 이 역시 ‘셀프디스’ 기법이라고 하는데, 그의 ‘말뚝박기’ 경험은 그의 말처럼 ‘핵폭탄급’이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무대에 오른다”는 말은 이 공연에도 그대로 적용된 듯하다. 그 주인공은 이제규다. 그날 공연에서 본 바로는 이제규의 공연이 ‘기술’이나 ‘기법’ 면에서 가장 풍부했다. 그는 알바하다가 사장님을 엄마로 착각해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얘기하다 갑자기 얼굴 근육을 씰룩거리며 관객을 웃겼다. 아마도 이제규식 스타일이 요즘 ‘코미디계 픽션’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송하빈이나 김동하은 약간 과장된 스토리 텔링을 하는 반면 이제규는 아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머리 속으로 상상해 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상상의 영역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은 그의 프로근성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 주자(혹은 타자 혹은 등장인물) 이제규처럼 상상력과 창의력 거기에다 약간의 뻔뻔함으로 무장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뛰어난 연예인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공연 뒤 출연 코미디언들과의 ‘포토 세션’이 있다. 이들과 찍은 사진 몇장을 스마트폰 앨범에서 한번씩 꺼내볼 때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저들의 눈물과 땀이 빚어 낸 개그 대사가 이 세상을 크게 바꾸지는 못해도, 사람들 스트레스는 확 날려버릴 순 있을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