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은 주은래 밑그림에 등소평이 다듬고 색깔 입힌 것”
[아시아엔=이중 전 숭실대 총장]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덩샤오핑(鄧小平)은 믿음이자 희망이었다. 덩은 저우의 기대에 보답했다. 오늘 중국의 실체와 미래는 저우가 그렸던 밑그림을 덩이 다듬고 빛깔을 얹힌 것이다.
<신중국사>(新中國史, China A New History)의 저자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는저우언라이의 중립성과 뛰어난 분별력을 높이 평가했다. 저우언라이는 위대한 능력을 지닌 매력적인 인물이다. 언제나 중립적인 위치를 지켰으며, 조직의 단합을 추구했다. 또한 최고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 뛰어난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다.
페어뱅크는 저우언라이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의 하나다. 저우언라이를 ‘명철보신’(明哲保身)의 달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명철보신’이란 말을 긍정적으로 풀이한다면, 분별력과 중립성이 그 말의 중심가치가 된다. 언제나 정세를 객관적·합리적으로 받아들이고 가볍게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며 중심을 잡고 자기 분수를 지킨다는 뜻이다.
그는 평생을 통해 쓰잘데 없는 권력투쟁에 말려들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냥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춰야 할 때 낮출 줄을 알았고, 전체와 대의를 존중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페어뱅크는 앞의 말에 이어 “그가 48년간이나 공산당의 중앙정치국에 몸담았다는 것은 세계 신기록의 하나”라고 찬탄하고 있다. 아무리 심하게 병을 앓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오쩌둥(毛澤東)은 절대 권력자였다. 권력의 추이에 누구보다도 예민하고 투쟁적인 마오였다. 그의 병중의 정치적인 발언에 함부로 나설 저우가 아니었다.
실제로 저우가 죽었을 때, 마오도 저우 못지않게 병이 심각했다. 작가 류야저우(劉亞洲)의 말을 인용해본다. 마오의 몸 상태가 문병이나 조문이 거의 어려웠다는 증언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마오에게는 이미 갈 능력이 없었다. 그 역시 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마르크스가 있는 저승에서 그와 저우언라이가 만났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솔직히 그 며칠 간 그에게 특별한 잘못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저우언라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폭죽을 터뜨린 일이 사람들을 무척 당혹하게 한 것 말고는. 중국에는 고래로 음력설인 춘절(春節)에 폭죽을 터뜨리는 풍습이 있다. 춘절 전날 밤부터 정월 대보름인 원소절(元宵節)까지 귀신을 쫓는다며 폭죽놀이를 즐긴다. 근래에 와서 폭죽놀이는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정부도 골치를 앓고 있다. 중국에선 작고 큰 행사 때, 폭죽놀이를 예사로 한다. 2009년 2월, 폭죽놀이 때문에 북경 중앙TV(CCTV)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부속 건물인 만다린호텔과 문화센터 건물을 홀랑 태워버린 일이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죽은 며칠 뒤가 춘절이었다. 그믐날 밤인데도 시내에선 이상하게 폭죽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마오가 거처하는 중남해 수영장에선 폭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부축을 받으며 마오가 직접 보온병 같은 큰 폭죽에 불을 붙이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폭죽도 엄청나게 큰 것으로 소문이 났다. 춘절에는 으레 있을 법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날의 이 사실을 입소문으로 들은 인민들의 실망과 분노는 커져갔다.
마오는 저우의 병세에 대해 매일 매일 보고를 받고 있었다. 저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다는 정황 보고도 계속 올라왔다. 마오는 저우의 죽음을 앞두고 침상에 누워 <루쉰(魯迅)선집>을 읽고 있었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나 마오는 서면으로 저우의 부음을 들었다. 정치국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비서가 읽어 내려갔다. “중국 인민의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걸출한 공산주의 전사 저우언라이 동지는 암으로 인해 온갖 약과 치료에도 효과가 없이···.”
어떤 기록은, 보고를 듣는 동안 마오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눈물이 뺨을 적시고 목까지 흘러내렸다고 적고 있다.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춘절에 마오가 폭죽을 터뜨렸다는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이다. 마오는 저우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많은 기록들이 가지 못했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지만 여러 얘기가 있다. 장례식에 입고 나갈 옷가지를 머리맡에 놓아두었고, 휠체어와 산소마스크도 준비했다는 얘기가 있다. 보좌진이 알아서 미리 챙겼을 것이다.
그러나 장례식 하루 전날 밤, 마오의 상태는 아주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대목에서 얘기들이 조금 헷갈리기 시작한다. 막상 저우가 숨을 거두자 마오의 최측근은 사실 보고를 못했다는 얘기가 있다. 반면에 앞에서 말한 대로 부음은 전했지만, 막상 장례식 일정은 알리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폭죽 터뜨린 것과 눈물을 보인 것, 둘 다 사실일 수 있다.
누가 진실을 알겠는가? 이런 경우, 이런 상황에 ‘진실’이라는 것이 도대체 존재하는 것인지조차 아리송하다. 그만큼 당시의 정황은 워낙 복잡하게 엉키고 또 헝클어져 있었다. 다만, 마오가 저우의 장례식에 가지 않은 것을 두고, 단순히 건강문제만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는 있다. 대체로 이런 ‘견해’들은 그냥 ‘억측’으로 치부되기 쉽지만 그럴 개연성도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사람이란, 때에 따라 시기심과 질투, 불안감을 노출하는 존재다.
소인도 거인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이런 추측들은 언제나 가능하다. 저우언라이는 죽기 한 해 전인 1975년 1월, 4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1차 회의에 참석해 ‘정부공작 보고’를 했다. 덩샤오핑이 초안 작성한 원고였다. 그는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 퍼부어 ‘4개 현대화 목표’를 소리 높여 외쳤다. 암세포가 전신에 퍼져있고, 집무도 병원의 병실에서 하고 있을 때였다. 인민대회당은 폭발적인 박수의 물결로 채워졌다.
‘인민의 총리’로 사랑을 받는 저우, 문화혁명 10년 내내 죽어라 고생만 하던 저우언라이였다. 그가 형편없이 수척해진 모습으로 단상에 나타났을 때, 그 자체가 감동이었다. 장칭 일당에 의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4개 현대화’를 저우는 지치지도 않고 다시 꺼내든 것이다. 장내는 숙연했고, 숙연과는 또 다른 열기로 가득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오의 표정은 무덤덤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장내를 울린 박수 소리는 그의 귀에도 쟁쟁했을 것이다.
실제로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를 경계하고, 저우가 자신보다 더 오래 사는 것에 대해 예민했다는 증언들이 적지 않다. 국정운영에 있어서 마오는 저우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지만 혁명과 국가건설의 지향에 있어서 저우와 마오는 철저하게 달랐다.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 자신보다 더 오래 살게 되는 경우, 혁명의 이념성과 지속성은 철저하게 파괴되리라는 것을 마오는 불 보듯이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아직까지는 중국공산당이 공식적으론 꺼리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후 저우언라이의 아내 덩잉차오의 일기가 제한적으로나마 공개되면서 저우의 죽음을 앞두고 마오쩌둥이 보여주었던 동태와 동선(動線)이 그대로 드러나 버렸다. 마오의 비정함과 복합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저우의 죽음과 관련해서 인민들의 노여움을 살만한 조짐들이 외국에 나가있는 중국 외교공관에서도 발견되었다. 외국에서 저우는 마력(魔力)의 정치인이다. 인기가 높은 수수께끼의 사나이다. 그의 죽음은 서방 인사들에겐 충격이었다. 외국 언론들이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정작 외국에 나가있는 중국 공관에서는 반기조차 올리지 못했다.
대사관 옥상에 중국 국기 오성홍기(五星紅旗)가 반기로 내려졌다가 한 시간 만에 다시 올려졌다. 추도회도 열지 못했고 애도(哀悼) 전문도 받을 수 없었다. 본국으로부터 내려온 훈령 때문이었다. 주재국의 의회나 관서에는 반기가 걸려있는데 정작 중국 대사관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 듯이 국기가 평온하게 펄럭거렸다. 당시는 장칭(江靑)을 비롯한 4인방이 마오를 둘러싸고 전횡을 일삼던 때였다.
전국에 방영되는 기록영화는 마오가 홍위병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저우언라이가 린뱌오(林彪)에게 길을 비켜주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저우가 황푸(黃?) 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일 때 린뱌오는 학생이었다. 린뱌오는 저우 총리 밑에서 국방부장(장관)을 지냈다. 그런 그가 문화혁명 초반에 급상승해 저우의 서열을 앞질렀다. 어느 군중집회에 저우가 연설을 했다. 이어 마오의 아내 장칭이 팔을 높이 치켜들고 “총리에게 배웁시다! 총리에게 경의를 표합시다!”라고 큰 소리로 외쳐댄다. 저우 역시 이내 팔을 높이 올려 “장칭 동지에게 배웁시다! 장칭 동지에게 경의를 표합시다!”고 외친다. 한편의 만화 같은 이런 장면들을 담은 기록영화가 전국을 누볐다. 이런 걸 볼 때마다 중국 인민들의 가슴은 아프고 저렸다.
문화혁명이 중반을 돌아 후반으로 달려가면서 저우언라이의 절망감은 더 깊어졌다. 저우는 마오에 대한 저항과 적응을 적절히 배합해 나가면서 혁명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하루 빨리 나라를 안정시키느냐 만을 생각했다. 네 차례나 큰 수술을 받는 등 깊은 병에 빠져있으면서도 그는 잠시도 국정(國政)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1974년 6월 1일 입원한 해방군 305병원 병실이 그의 집무실이었다. 그해 12월에 접어들자 그는 죽기 살기로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창사(長沙)에 머물고 있던 마오쩌둥을 찾아갔다. 의료진이 한사코 말리는 데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오와의 어려운 담판을 통해서 문화혁명 말기의 인사를 마무리했다. 덩샤오핑이 다시 전면에 나섰다. 1974년 12월 23일의 ‘창사결책’(長沙決策)이다.
저우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 자신이 당대에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중국의 미래에 대해 더 마음을 썼다. 덩샤오핑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그것이었다. 덩샤오핑을 통해 중국의 미래를 바라보았다. 저우언라이에게 덩샤오핑이란 존재는 믿음이자 희망이었다. 저우는 마오에게 자기 후임으로 덩을 추천했다.
그러나 마오는 엉뚱하게 화궈펑(華國峰)이라는 무명의 측근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는 ‘4인방’에 속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저우와 덩의 사람도 아니었다. 4인방 세력은 국정에 맹탕이었고 능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대신 그들은 ‘영구혁명’을 내세워 마오의 마음을 붙들었다. 그 대칭에 있는 덩샤오핑은 ‘마오의 혁명’엔 늘 걸림돌이었다. 안심이 되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결국 저우언라이의 추모 열기로 빚어진 천안문 사태를 뒤에서 조종했다는 누명을 쓰고 또 한번 마오에 의해 실각되었다. 그러나 덩은 4인방이 무너지면서 다시 극적으로 중국의 미래 속으로 돌아왔다.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의 기대에 보답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중국의 실체와 미래, 그것은 저우가 그렸던 밑그림을 덩이 다듬고 빛깔을 얹힌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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